화요일, 12월 30, 2008
몸살.
월요일, 12월 29, 2008
이야기.
방은 어두울 때라야만 그 드넓은 공간감이 온 세포 끝에 닿는다. 깊은 우물같은 방 안에서, 가을 초입에는 아직 발열할 때도 아닌 파이프 속을 오가는 물 소리를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때로는 이 어둠의 까닭모를 폭력성에 탄식하면서도,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시 이불을 뒤집어 쓰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관념만큼이나 늘 체력도 종잇장처럼 얄팍해져 너덜너덜했다. 너덜한 이불을 붙들고 까무룩 잠이 들면 벌건 상처 위에도 딱지가 앉고, 화난 듯 부은 데도 가라앉곤 했다. 베개에 스미는 머릿내가 약손처럼 머릴 쓰다듬었다. 더는 디딜 틈이 없는 침대머리며 발 뻗는 데의 빼곡한 공간감은 그제야 익숙한 질서가 된다.
어떻게 일주일이 갔는지도 모를 날들 새로 눈을 굼벅일 때마다 붉은 고름줄들이 널뛰듯 또아리를 틀었다. 인류의 진화론적 조상과 같은 자세로 꾸역꾸역 글자들을 토해내고, 다시 허겁지겁 집어삼키고 했다. 정말 쓰고 싶은 글자들은 끄적여지다 만 채로 목구멍과 블로그와 현실 어딘가의 틈새에 잠시 끼었다가 모래알같은 바이트들로 스르르 흩어져내리곤 했다. 핏기어린 눈곱이 낀 고양이와의 인사와, 불행의 계산가능성과,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음에도 처음 발 딛었던 자리를 계속 돌아보게 되는 지난한 근성과, 완벽한 남자의 헌책방으로 가는 티켓에 대한 이야기들도 쓸려 나갔다. 대개의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쓸려나간 이야기들은 우물에 있다. 그것들은 습한 벽들 사이에 이끼처럼 끼어 우물 안에서만 맴을 돈다. 단 맛이 좋아 사카린 포대를 우물에 쏟아 부었다던 아이가 등장하는 개발독재기의 농담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 아이가 그 달콤하고도 흉폭한 발암물질을 우물에 들이부은 때부터 이야기들은 말살되거나, 혹은 독한 내성을 품고 우물 안에서의 삶을 이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부터 이야기라는 족속들은 죄다 내면의 이미지를 들여다보거나 그 안의 눅눅한 감정들을 긁어모아 내놓는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말이다. 그것들만이 달콤할 것으로 믿었고, 미각의 지평은 언제고 음습했다. 저칼로리 올리고당이 등장한 지금에도 여전히 이야기들은 우물을 고향으로 삼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물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리고 싶다. 말라붙은 이야기들에 물을 주고 싶다. 소독냄새 나는 이야기들을 소금을 묻혀 박박 씻어 단단하게 주물러내고 싶다. 나누지 않는 달콤함은 칼로리덩이들일뿐이다. 우리의 혀가 동이를 타고 오를 때를 상상한다. 낭창낭창한 붉은 혀끝이 세계의 공기에 가 닿을 때, 당신과 미각을 나눌 때.
수요일, 12월 24, 2008
어떤 변명.
토요일, 12월 20, 2008
from [짧은 여행의 기록] by 기형도(1990).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문다. 그래, 그녀는 잘 참아낼 것이다. 어쩌면, 이발사 사내와의 영원한 결별까지도 참아낼 것이다. 나는 앞으로 그녀가 잘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사내에 대해 그녀가 계속해서 사랑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 증오의 힘이든 애정의 힘이든 상관 없는 일이다. 환상이란 삶의 도피이며 정면 대결에의 회피라는 생각은 좁은 편견의 오류일 뿐이다. 삶과 정면대결하여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들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들은 모두 어둡고 습습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모습으로 추정되는, 환상(幻想) 또는 허상(虛想)에서 비롯되어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양식(糧食)이 비롯되는 곳은 환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이 존재하는 어두움의 창고를 인식하는 개인의 성숙에서 우리의 삶과의 끈질긴 투쟁은 그 무기를 얻게 되리라. 설령 그 이발사가 그녀 앞에 영원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지라도, 그녀 앞에 언젠가 다른 사람, 다른 시차(時差)로 새로운 끈이 나타나 그녀를 지탱해 줄 때까지의 그 생존(生存)의 힘은 그녀의 이발사에 대한 애증(愛憎)일 것이다.(...)(...) 그래, 나는 내 이름 위에 이삿짐처럼 얹힌, 내가 끌고다녀야 할, 생(生)의 무게를 너무도 비극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알 수 없이 막막한 권태와도 같은 생의 무게와의 시이소 놀음에서 언제나 패배함을 스스로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녀석과 나는 그러한 중량감과의 동행(同行)의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그가 그러한 삶의 중량감을 언제나 무거워하여 마침내 그것을 던져버림으로써 해결한 반면, 나는 어쩌면 그것을 은밀히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내 의식을 세게 쳤다. 내 삶 곳곳에 미리 숨어 있다가 갑자기 악수를 청할 당혹한 그 절망의 정체를 나는 희망이라고 불러온 것은 아니었는지. (...)(...)(...) 그러나 행복하다는 환상, 아니 착각 그 이후의 것은 이미 착각이 아님을 사내도 알고 있으리라. 렌즈는 사물의 허상(虛像)을 보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실상을 가리키는 좌표가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념이지만 우리의 신념속에 머무는 관념은 그 어떤 사물보다 견고한 것이다.- "환상일지", pp. 114-118.
수요일, 12월 10, 2008
앞가림과 혁명.
월요일, 12월 08, 2008
회식.
토요일, 12월 06, 2008
무너짐.
목요일, 12월 04, 2008
말건넴의 윤리, [사과](강이관, 2005)

현정(문소리)은 섹스 후에 늘 잠들어 있는 남자들을 물끄러미 본다. 남자들은 섹스가 끝나면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부치기에 바쁘다. 남자들을 향한 다정한 눈길은 카메라에 의해 두 번이나 포착되지만, 남자들은 응답이 없다.
유사한 좌절은 사실 영화 내내 일종의 패턴을 가지고 반복된다. 변주되는 것이 있다면 현정이 말을 건네는 대상과, 말건넴과 좌절 사이의 주기일 것이다. 민석(이선균)은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건네며 “내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쁜 남자들의 뻔한 대사같던 그 말은 후에 현정이 상훈(김태우)와 결혼한 뒤에야 조금 선명해진다. 천상 자기세계를 침범당하기 싫어하는 남자인 상훈에게 기어이 꽃무늬남방을 입히고, 따분한 교회에 보내는 모습은 마치 현정이 상훈의 세계를 집어 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민석의 말에서 읽어낼 수 있듯 정말 현정은 파괴적인 여자인 것도 같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현정이 남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자,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 그 자체에서 비롯된 마찰이기도 하다. 현정은 가뭄에 콩 나듯 함께 일 이야기를 나누는 술자리 와 동료들 외에는 이렇다할 취미도 친구도 없는 여자이다. 그래서 현정이 대개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과 장소는 가족과 집이다. 존재감없이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과 붙박이장처럼 집구석에 붙어 침잠하는 시간을 제거하고 나면, 이 여자에게 남는 ‘외부’는 남자들과의 시덥잖은 연애뿐이다. 그래서 현정은 그 관계에 모든 것을 건다. 혹은 걸어야 한다는 믿음에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정에게는 직장과 친정도 포기한 채 남편의 전근을 좇아 구미로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남편과의 관계가 그녀에게 있어 세계와의 유일한 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교통체증처럼 막혀 있던 그녀의 마음이, 상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미에서는 얼마간 풀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얼마간은 그녀 스스로의 말건넴이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절의 계기는 계절처럼 다시 찾아온다. 구미로의 전근을 둘러싼 상훈의 거짓말과 무능에 현정은 답답하다. 현정을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상훈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끝내 모른다는 것이다. 현정은 거짓말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지만, 상훈은 자신의 선택의 정당성을 변호할 따름이다. 후에 현정이 이혼 제안을 건넨 뒤 상훈에게 그에 대해 물었을 때 바랐던 것 역시 동의 여부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을 것이다. 현정은 상훈과 자신 사이에 놓여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내는 메커니즘을 알 수 없는 통역기 앞에서 숨이 막힌다.
구미에서 민석의 등장은 새삼스럽다. 말로써 사과를 건네는 것은 민석이지만, 현정은 사과를 사 손에 쥐어 줌으로써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구미에서 돌아와 과장이 되어 있는 현정과 민석의 데이트 씬의 연출은 도드라지게 선명해서, 마치 구미에서의 시간들이 일어나서는 안 될 막되먹은 상상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쨌거나 말건넴과 좌절의 반복 속에서 현정은 집보다 직장에 더 오래 있고, 애인이라는 취미(“너 만나는 게 재미지”)도 생긴 멋드러진 혹은 강한 여자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을 찾은 상훈을 보면서, 이혼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차고 올라와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현정은 어떤 기시감같은 순간을, 혹은 몇 년 전 민석이 자신에게 비슷한 말을 건넬 때의 마음을 단물처럼 혀 끝에 느꼈을 것이다. 너로 인해 내 삶이 끔찍하게 집어삼켜져서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더는 못 버틸 것 같아, 라는. 현정과 민석은 서로 다른 시점에서 유사한 상황에 놓여 유사한 선택을 하는 인물들이다. 상황처럼, 사과 역시도 순차적으로 온다. 민석이 현정에게 사과했듯, 현정도 상훈에게 사과해야 한다. 어찌보면 ‘현정같은’ 여자가 ‘상훈같은’ 남자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처럼 보임에도, 현정이 민석의 마음을 거절한 후 상훈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하는 까닭은 그것이 현정이 믿는 말건넴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남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닫힌 말건넴을 시도하며 그것이 실패할 때에는 침잠할 줄 밖에 모르던 여자가, 그 관계 밖으로 또박또박 걸어나와 자신의 세계와 언어체계를 좌절이나 실패가 아닌 방식으로 번역해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 대한 기술이기도 하다. 그녀는 문을 걸어잠그기보다 상훈을 보듬어 준다. 사과가 그녀의 종착역은 아닐 것이다.
화요일, 12월 02, 2008
어떤 불시착.
월요일, 12월 01, 2008
성장은 우스운 파국이다, [마음의 속삭임Le Souffle au Coeur](Louis Malle, 1971)

1954년 프랑스, 디종은 평화로운 도시다. 인도차이나를 둘러싼 식민지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른들의 식사시간의 단골 메뉴인 정치는 현실감이 없다. 불투명하게 돌아가는 세계에서 소년 로랑(Benoit Ferreux)이 정치 대신 선택한 것은 찰리 파커의 재즈며, 헨리 밀러의 문학이며 하는 것들이다. 소년은 세계가 무엇인지, 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하지만 현실로부터 온전히 발을 떼기에는 여전히 발돋움이 필요한 나이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레코드판을 훔쳐 듣고, 금서를 읽으며 자위를 한다고 해도 학교에는 늦지 말아야 한다. 종교를 믿지 않을지언정 복사는 서야 하는 것이다. 소년은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존재이다. 합법과 질서의 세계, 그리고 불법과 무질서의 세계. 그러나 소년은 혼란스럽다. 질서 속에서 따스했던 엄마의 품은 사실 소년의 것이 아니라 얼굴 모를 남자의 것이고, 아빠는 소년을 증오한다. 신의 복음을 가르쳐야 할 학교는 군국주의를 내장하고 있으며, 성스러운 신부는 소년들의 성을 탐한다. 로랑에게는 오히려 형들이 보여주는 짓궂은 일탈과 폭력, 외설과 불안정으로 점철된 불법과 무질서의 세계가 더 현실에 가까운 것만 같다. 그러나 두 형들이 종종 흉내내며 로랑을 놀리듯, 이들은 엄마-아빠가 대변하는 질서와 위악이라는 역설에 대한 안티인 동시에 그 상동으로서의 역설을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로랑은 형들이 보여주는 세계에 늪처럼 빠져들며 그들을 존경한다 말하지만, 기실 그들은 로랑의 첫경험을 훼방놓듯 언제고 로랑이 현실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엄마가 로랑을 언제고 순진무구한 아이로 여김으로써 소년의 재능을 아이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아이’라는 말은 소년에게 무엇보다 감추고 싶은 오점이다. 소년에게는 모든 종류의 일탈이 다 어른됨, 혹은 ‘아이가 아님’에 대한 인정투쟁인 듯 보인다. 어른됨의 가장 강렬한 핵심에 형들의 그것보다 작은 자신의 성기가 있을 것만 같았던 소년은 엄마로부터의 분리를 다짐하듯 엄마를 안아주고 인사를 나눈 뒤에 형들이 안내한 사창가로 떠난다. 소년이 원했던 것은 따뜻한 키스지만, 손님인 그는 아이처럼 성기를 씻김당한 뒤 키스없는 섹스만을 허용받을뿐이다. 소년이 여자를 안은 모습은 엄마를 안을 때와 닮아 있다. 소년은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건만, 형들의 도움으로 다시 엄마를 닮은 여자를 안는다. 로랑의 모든 ‘분리’의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것이 부모와 형들에 귀속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분리가 엄마라는 존재를 우회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랑은 자살을 까뮈를 읽으며 관념으로만 상상할 뿐, 실천에 옮길 수는 없다. 로랑에게 있어 자살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독립과 선택이 아니라 엄마라는, 그 자신의 성장에서의 핵심으로부터의 도피였기 때문이다.
소년은 엄마와 함께 요양을 떠난다. 아직 열넷인 소년은 여자아이들 앞에서 열다섯이 되었다가, 열여섯이 되었다가 한다. 실제로 소년의 얼굴에서는 점차 어른의 표정이 읽힌다. 소년은 ‘어른처럼’ 거들먹거리고 주문하며 술을 마시는 법을 익혀 나간다. 그럼에도 소년은 해갈되지 않는 무언가를 더듬어낼 수 없다. 엄마가 애인과 잠시 도시를 떠난 사이, 소년은 엄마의 옷을 입고 화장을 해 본다. 소년은 엄마가 가지고 싶다. 하지만 가질 수 없다. 소년은 엄마가 되고 싶다. 하지만 될 수 없다. 거울에 비친 분칠을 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엄마가 될 수는 없다. 어른이 될 수가 없다. 다시 엄마가 돌아오고, 혁명의 날 축제 기간 소년은 엄마와 친구가 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그러나 소년은 어른이 되어야 했다. 성장의 핵심에 다다라야 했다. 엄마는 소년에게 두 번 다리사이를 내어 준 셈이다. 아이로 태어날 때, 그리고 어른이 되려 할 때.
제네바 협정이 맺어졌다는 소식이 들려 오고, 로랑의 어른되기 프로젝트도 끝날 때가 된다. 그 역시도 조국처럼 그가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식민지들을 하나씩 떠나보내야 한다. 갑작스레 온 가족들이 모인 그 날 아침, 언제 빚어졌는지도 모를 어떤 불화는 실없는 웃음으로 증발해버린다. 어쩌면 일종의 이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어떤 파국도 우발적으로 찾아와 이리 자연스레 날려보내야 하는 것인 마냥, 영화는 뒤틀어진 세계에서 어른됨이라는 불투명한 투쟁을 완성시킨다.
토요일, 11월 29, 2008
개꿈들.
수요일, 11월 26, 2008
소년들의 성장담은 판타지일지도 몰라,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민규동, 2008)

이 영화의 주인공은 너무도 명백하게 김진혁(주지훈)으로 보인다. 그는 갑자기 연 케익점에서 속에 없는 미소를 팔며 많은 손님들을 맞지만, 여전히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케익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만은 받아들일 수 없어 한다. 마치 그가 어린시절로부터 이름이 바뀌어도 여전히 어린 시절의 끈적이고 스멀거리는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그가 아무리 ‘영감’이라고 불릴 만큼 치밀하고 완벽한 주인장 행세를 하려 해도 그 말끔한 생크림같은 표면을 걷어내면 공허한 빵조각만이 남을 따름이다. 그 속을 과일 칵테일처럼 채우는 것은 뮤지컬이거나 스릴러이며, 진혁은 노래하거나 식은 땀을 흘리며 성장을 끊임없이 유예하는 소년이다.
그에게 있어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이행한다는 것, 혹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트라우마로 인해 거부했던 미각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거부했던 것이 자신에게 억압과 공포를 행사한 남성이라는 존재일 때, 어른이 되기 위해 그가 받아들여야 할 또 한 가지는 호모섹슈얼리티가 된다. 이처럼 진혁의 성장에서 케이크(미각)와 남자(섹슈얼리티)가 동일한 상징의 두 면이라면, “케이크와 남자는 맛을 봐야 안다!”는 카피는 생각 이상으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의 전개가 이 ‘애늙은이’의 성장담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진혁은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있다’는 표현을 영화의 에필로그에서야, 악몽없는 단 잠에서 깨 모닝담배를 피며 내뱉는다. 그의 성장은 민선우(김재욱)와 자연스레 어깨동무를 나누며 케익을 파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진혁의 경우처럼 명확히 드러나진 않지만, 기범(유아인)과 수영(최지호)에게 있어서도 성장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단지 케익을 좋아하는 전직 복서였던 기범이 유망한 파티쉐 견습생으로 빠리에 날아가게 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수영이 독립을 선언하게 되는 과정 역시 진혁의 성장담과 맞물려 영화의 플롯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케익을 팔며 성장하는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서 성장하지 않는, 그러니까 ‘이미’ 성장해 있는 유일한 캐릭터는 ‘마성의 게이’인 민선우이다. 일견 민선우는 일본식 하렘물의 성별전환 버전 캐릭터인 것 같지만, 실은 나머지 ‘소년’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토닥이는 일종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유아인에게는 기술로, 최지호에게는 격려와 믿음으로, 진혁에게는 연정과 ‘남는다’는 결정으로. 원작과 이 영화에서 케익만큼이나 화려하게 다루어진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호모섹슈얼리티에 민규동이 부여하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는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앤티크를 위기에 몰아넣는 무책임한 트러블메이커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고3 때 - 혹은 중3 때 - 이미 더 성장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세상의 쓴 맛을 이미 알아버린 ‘어른’이라는 것. 앤티크의 세계에서 어른은 케익을 ‘단 맛’(진혁)뿐이라고 생각지도 않지만, 탐내고 집착(기범)하지도 않는다. 그저 돈을 위해 만들고 팔 뿐이다. 이는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6개월치 월급을 긁어 모아 산 프라다 바지를 입고 클럽에 가서 몸을 흔들고 미소를 날려 남자를 꼬실 경우에도, 함부로 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집착하지는 않기. 어쩌면 민선우는 성장 이후, 혹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기실 또 하나의 판타지가 되는 것을 경계하게 하는 현실적인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성장 ‘이후’가 어떤 방식으로 펼쳐질지는 모를 일이다. 성장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또다른 성장의 지점을 물가의 조약돌처럼 밀어내 유예하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앤티크에서의 성장 프로젝트가 종결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이상 앤티크라는 공간은 필요없게 된다. 성장을 위한 조미료같은 뮤지컬과 스릴러와 모자이크식 플롯 전개도 이제는 의미가 없으므로, 영화는 이쯤에서 끝나야 한다. 그래서 갈등이 해소되는 지점은 끝장나게 달콤하기보다 다소 싱겁다. 대개의 케익이 주는 포만감이 그렇듯이.
오늘의 귀가.
월요일, 11월 24, 2008
과거가 기억되는 폭력적인 방식에 관하여, [이리] (장률, 2008)

지금은 익산이 된 이리역에서 있었던 77년의 폭발사고를 추모하는 문화제가 열리지만, 정작 추모되고 기억되는 것은 그 문화제에 없음을 못박으며 영화는 시작한다. 추모받아야 할 과거는 스스로를 추모할 따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후에 진서(윤진서)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이 경로당의 TV를 통해 잡힐 때에야 알아차리게 된다. 그녀가 느닷없이 카메라 앞에서 하춘화의 노래를 부르고, 구역질을 쏟아내는 것과 같은 불가해한 모습 역시도 과거의 흔적이 대중적인 방식으로 재현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사고 당시 복중에 있었던 진서는 폭발의 자국이며 참사의 흔적이다. 그녀는 잊혀진 과거를 표상하는 존재이다. 진서는 아름답지만,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을 티켓다방 아가씨처럼 자원으로 활용할 줄 모르는 여자다. 그녀에게는 자원이 없다. 성실하게 경로당 바닥을 닦아 내고, 강의실 뒤편으로 새어나오는 중국어를 따라 발음해 보지만 정작 그녀는 모국어로도 필요한 말을 제 때 못 한다. 종종 진서는 계산을 하지 못해 지갑을 째로 내민다. (손상된 계산능력은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기억을 계산하는 능력의 손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바보같은’ 진서는 원장으로부터는 임금을 체불당하고, 학원생과 인근의 남성들로부터 상습적인 강간을 당해 자궁이 손상되곤 한다. 이리 사람들은 이리처럼 진서, 이리의 과거를 착취하고 이용한다.
그녀의 오빠(엄태웅)는 그녀를 안쓰러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바보처럼 당하고 또 당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그녀를 견디지 못해 그녀를 목조른다. 베트남 전우회의 늙은 사내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한 진서의 앙갚음을 위해 그는 전우회의 물건들을 쓸어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녀를 전우회에 대신 보낸 티켓다방 아가씨를 강간하고야 만다. 폭발의 기억이 진서의 몸에 기록되는 것처럼, 상처도 처벌도 여성들의 몸에 가해지는 것이다.
진서에게 언제고 안전과 안정이 불가하듯, 영화에서 재현되는 익산이라는 도시를 가득 메운 어떤 불안정함 - 해소되지 않는 과거의 불가해함과 안정하게 화해하는 일 역시도 불가능한 일인 것만 같다. 옛 애인을 찾아온 할아버지와 오랜만에 꽃단장을 하고 선 할머니의 대화가 침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진서의 몸을 탐하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노인이 자신의 몸을 처벌했던 것처럼. 오히려 우리 사회가 쉽사리 끄집어내 다룰 수 없는 기억을 처리하는 방식은 진서라는 타자의 경험과 피해를 또다른 타자(이주노동자)의 가해로 덧씌우는 것이다.
태웅이 내내 만들던 모형이 30년 전 폭발한 이리역의 모형이라는 사실은, 그 모형에 폭죽이 타들어가 터질 때에서야 선명해진다. 몇 번이고 들판에서 폭발했던 폭죽은 이 폭발의 재현의 전조이다. 때마침 재현되는 것은 MB정권이라는 독재정권의 당선이다. 영화는 30년이 지난 이 곳에서, 기억되는 것은 무엇이며, 변화한 것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진서는 새로 온 중국인 선생에게 중국어로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한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전혀 '바보같지' 않다. 죽었어야 할 그녀의 귀환은, 그저 중국어 학원의 선생이 바뀌는 것처럼 미묘한 변주를 통해 끈질기게 돌아오는 과거의 귀환이다. 이것은 해소되지 않고서는 몇 번의 폭발에도, 몇 번의 살해에도 다시 그 과거를 우리 사회의 기억체계 속으로 불러들여 환기시키고자 하는 영화의 의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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