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2월 30, 2008

몸살.

뱃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가래의 내음이 역하다. 목구멍에 뜨거운 물을 들이붓는 외에는 달리 처방할 도리가 없다. 좁은 방 서랍들을 파헤쳐 봐도 약알 하나 나오지 않아, 책상 위를 뒹굴던 육 개월 전쯤 처방받은 정체모를 약을 씹어 삼킨다. 감기약이었을까, 아니면 진통제였을까. 열이 진득허니 올라 죽은 듯이 자면 좋으련만, 이미 연료인 꿈을 너무 많이 소비한 탓인지 한 번 깬 정신을 놓기가 쉽지 않다. 

목 능선을 타고 오르는 차가운 온도계를 힐끔 보고 간호인은 숫자를 끄적인다. 37.7. 높은 값인지, 높다면 얼마나 높은지를 몰라 고개를 갸우뚱할 새도 없이 의사는 집게로 입을 벌린다. 드라큐라처럼 양 어금니 있는 께에 철심을 박아넣은 날이라, 입을 벌리는 게 여간 민망치 않다. 잇몸을 향해 곤두선 두 개의 임플란트가 번쩍인다. 밥을 먹을까, 책을 읽을까, 모임에 갈까, 하는 고민들은 죄다 그것들의 실행가능성에 대한 질문으로 바뀐다. 질문에 대한 답은 수시로 번쩍이며 갈팡질팡했고, 얕은 졸음과 분투하는 정신도 죽어가는 전구처럼 깜박였다.

몸이 아플 땐 세계에 대해 잠잠한 사람이 된다. 방구석에 앉아 아프다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 봐야, 걱정해줄 사람에게도 신경쓰지 않을 이에게도 불필요한 정보일 뿐이다. (보살핌의 고리들로부터 자유로울 수야 있으랴만, 버틸 수 있을 만큼은 버티는 게 미련스럽단 얘길 들을망정 마음이 편하다.) 몸은 정말이지 불필요한 신호들과 잡음들이 끊이지 않는 메트로폴리스의 밤거리 같아서, 잠시 잠깐 페이스를 놓치면 따라잡기가 어려운 일이 된다. 며칠째 쌓여만 가는 일간신문처럼, 그러나 대개의 사건들은 아슬아슬하게도 예측가능한 범위 내에서 경악스러울 것이다. 물론 진정한 사건은 그 예측가능성을 넘어서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그러므로 예측불가능한 수면의 세계로. 

월요일, 12월 29, 2008

이야기.

방은 어두울 때라야만 그 드넓은 공간감이 온 세포 끝에 닿는다. 깊은 우물같은 방 안에서, 가을 초입에는 아직 발열할 때도 아닌 파이프 속을 오가는 물 소리를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때로는 이 어둠의 까닭모를 폭력성에 탄식하면서도,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시 이불을 뒤집어 쓰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관념만큼이나 늘 체력도 종잇장처럼 얄팍해져 너덜너덜했다. 너덜한 이불을 붙들고 까무룩 잠이 들면 벌건 상처 위에도 딱지가 앉고, 화난 듯 부은 데도 가라앉곤 했다. 베개에 스미는 머릿내가 약손처럼 머릴 쓰다듬었다. 더는 디딜 틈이 없는 침대머리며 발 뻗는 데의 빼곡한 공간감은 그제야 익숙한 질서가 된다.

어떻게 일주일이 갔는지도 모를 날들 새로 눈을 굼벅일 때마다 붉은 고름줄들이 널뛰듯 또아리를 틀었다. 인류의 진화론적 조상과 같은 자세로 꾸역꾸역 글자들을 토해내고, 다시 허겁지겁 집어삼키고 했다. 정말 쓰고 싶은 글자들은 끄적여지다 만 채로 목구멍과 블로그와 현실 어딘가의 틈새에 잠시 끼었다가 모래알같은 바이트들로 스르르 흩어져내리곤 했다. 핏기어린 눈곱이 낀 고양이와의 인사와, 불행의 계산가능성과,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음에도 처음 발 딛었던 자리를 계속 돌아보게 되는 지난한 근성과, 완벽한 남자의 헌책방으로 가는 티켓에 대한 이야기들도 쓸려 나갔다. 대개의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쓸려나간 이야기들은 우물에 있다. 그것들은 습한 벽들 사이에 이끼처럼 끼어 우물 안에서만 맴을 돈다. 단 맛이 좋아 사카린 포대를 우물에 쏟아 부었다던 아이가 등장하는 개발독재기의 농담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 아이가 그 달콤하고도 흉폭한 발암물질을 우물에 들이부은 때부터 이야기들은 말살되거나, 혹은 독한 내성을 품고 우물 안에서의 삶을 이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부터 이야기라는 족속들은 죄다 내면의 이미지를 들여다보거나 그 안의 눅눅한 감정들을 긁어모아 내놓는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말이다. 그것들만이 달콤할 것으로 믿었고, 미각의 지평은 언제고 음습했다. 저칼로리 올리고당이 등장한 지금에도 여전히 이야기들은 우물을 고향으로 삼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물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리고 싶다. 말라붙은 이야기들에 물을 주고 싶다. 소독냄새 나는 이야기들을 소금을 묻혀 박박 씻어 단단하게 주물러내고 싶다. 나누지 않는 달콤함은 칼로리덩이들일뿐이다. 우리의 혀가 동이를 타고 오를 때를 상상한다. 낭창낭창한 붉은 혀끝이 세계의 공기에 가 닿을 때, 당신과 미각을 나눌 때. 

수요일, 12월 24, 2008

어떤 변명.

아무도 찾지 않는다 한들 아무 이야기나 써갈길 수야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매, 몇 날을 끙끙 앓으며 글의 초입을 썼다 또 지우기를 몇 차례다. 마음에 차는 이야깃거리가 없는 것이라기보다 무슨 말이라도 끄집어내기가 참 피로한 탓일게다. 외려 인적드문 곳에서 발가벗겨질 것이 두렵고, 초조하고 군살많은 속내를 들킬 것 역시 창피한 까닭이다. 고민이랄 것도 없이 시간을 낭비하다 종국에 지워지는 것은 쓰던 글이라기보다는 속에서 뜨거운 입김처럼 들끓던 무엇이다. 표정없는 사진처럼 쓰여지다 만 감정들은 침침히 가라앉아 아랫배를 묵직하게 짓누르곤 했다.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서도 비워지지 않는 그것들은 밤이 되면 신경을 자극하다 다시 부옇게 제자리로 돌아가길 반복한다. 

지금보다 절실한 것들이 많았던 때에 대해 생각한다. 절실함의 뒷면에는 언제나 치명적인 위험이 독풀처럼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고, 해독없는 고통은 절실한 그것 이외의 무엇도 욕망하거나 원망할 수 없게 했다. 매일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글을 남기지 않고서는 목젖을 누르는 압력을 감당할 수 없었을 시절이다. 손꼽을 만큼 간절했던 것은 단지 하루하루의 나를 승인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삼키고 무엇이든 회개할 터이니 오늘도 전등 꺼진 방에서 꺼이꺼이 울음하는 것으로 죽음을 대신하고 살자고, 유령처럼 걸린 몸에 맞지 않는 교복을 벗고 나서는 내가 무엇이건 나를 놓아주겠노라고.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무엇으로부터였는지는 쉬이 가늠할 수 없다. 여전히 때로는 절실한 것들이 불쑥 방문하며, 불 꺼진 방에서 오래도록 잠자코 앉아 있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가시적인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는 경우에는 가스 밸브를 잠그듯 철저히 그 허무맹랑한 열망을 짓누르는데 익숙해 졌으며, 어둔 방에서 절로 터지던 울음이 냉소와 피로가 되었다는 점일테다. 바라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달아나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참으로 피로한 일이다. 수선스럽게 속을 걷어차던 마음들도 실은 피로의 충실한 심복이며, 그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또 말을 잊는다. 이 미심쩍은 증발에 대해서도 곧 잊게될 것이다. 침침하게 가라앉고만 영양가없는 고백과 혐오마저도. 나는 무엇도 아니게 된 나를 피로에 놓아준 것이다.

토요일, 12월 20, 2008

from [짧은 여행의 기록] by 기형도(1990).

  나는 담배를 한 대 피워 문다. 그래, 그녀는 잘 참아낼 것이다. 어쩌면, 이발사 사내와의 영원한 결별까지도 참아낼 것이다. 나는 앞으로 그녀가 잘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사내에 대해 그녀가 계속해서 사랑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이 증오의 힘이든 애정의 힘이든 상관 없는 일이다. 환상이란 삶의 도피이며 정면 대결에의 회피라는 생각은 좁은 편견의 오류일 뿐이다. 삶과 정면대결하여 절망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들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들은 모두 어둡고 습습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러나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모습으로 추정되는, 환상(幻想) 또는 허상(虛想)에서 비롯되어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정신적 양식(糧食)이 비롯되는 곳은 환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이 존재하는 어두움의 창고를 인식하는 개인의 성숙에서 우리의 삶과의 끈질긴 투쟁은 그 무기를 얻게 되리라. 설령 그 이발사가 그녀 앞에 영원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 지라도, 그녀 앞에 언젠가 다른 사람, 다른 시차(時差)로 새로운 끈이 나타나 그녀를 지탱해 줄 때까지의 그 생존(生存)의 힘은 그녀의 이발사에 대한 애증(愛憎)일 것이다. 

(...) 

  (...) 그래, 나는 내 이름 위에 이삿짐처럼 얹힌, 내가 끌고다녀야 할, 생(生)의 무게를 너무도 비극적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알 수 없이 막막한 권태와도 같은 생의 무게와의 시이소 놀음에서 언제나 패배함을 스스로 즐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녀석과 나는 그러한 중량감과의 동행(同行)의 방법이 달랐던 것이다. 그가 그러한 삶의 중량감을 언제나 무거워하여 마침내 그것을 던져버림으로써 해결한 반면, 나는 어쩌면 그것을 은밀히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내 의식을 세게 쳤다. 내 삶 곳곳에 미리 숨어 있다가 갑자기 악수를 청할 당혹한 그 절망의 정체를 나는 희망이라고 불러온 것은 아니었는지. (...)

(...)

  (...) 그러나 행복하다는 환상, 아니 착각 그 이후의 것은 이미 착각이 아님을 사내도 알고 있으리라. 렌즈는 사물의 허상(虛像)을 보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실상을 가리키는 좌표가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의 관념이지만 우리의 신념속에 머무는 관념은 그 어떤 사물보다 견고한 것이다. 

- "환상일지", pp. 114-118.
  

수요일, 12월 10, 2008

앞가림과 혁명.

귓속으로 고름처럼 소리들이 파고든다. 고장난 축음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자글거리는 철지난 가요들과 둔탁한 망치질같은 사내들의 음성. 눈은 둘 곳이 없어도 감을 수 있지만 귀란 그런 것이 못 되어서, 알아먹지 못할, 그렇다고 걸러내지도 못할 소리들이 반고리관 따위의 기관들을 갈취하는 것을 두고볼 밖에야 별다른 도리가 없다. 대신 얼굴이 흉칙하게 허물어지는 상상을 한다. 소리를 가르며 헤엄칠 때마다 출렁이는 살덩이들을. 그 얼굴에선 눈과 귀도 그저 야트막한 굴곡으로 처리된다.

앞가림이라는 명목으로 정작 눈을 걸어 잠그고 살았던 것을 변명이 아닌 방식으로 말할 수 없을 것임을 잘 안다. 각자의 앞가림들은 범퍼카처럼 충돌을 거듭했지만 그것들은 얼마나 강고하고 튼튼한 것들이었나. 타자없는 미래, 혹은 타자만이 존재하는 미래를 종종 상상하며 그 미래에 세를 내어주지 않은 이들에게만 그 미래의 전망을 물었던 것은 아닌가. 누군가에게 에피소드가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에피소드가 되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페르소나가 되는 것이 보다 섬찟한 일이었던 것을.

돌아보면 변하지 않은 것이 없다. 흉칙하지 않을 따름이지, 눈멀고 귀먹지 않고서야, 제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 하고서야 살아남은 이가 없었다. 살아남지 못한 이들은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닌 채로 담배를 꺼내 물었고, 살아남기 위해 변화하는 것, 혹은 살아남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라는 믿음이 바싹 타들어갔다. 자글자글. 이 혁명은 길지 않다는 어슴푸레한 확신, 혹은 체념같은 것이 필터에까지 닿을 때 다시금 거리에서 철지난 가요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월요일, 12월 08, 2008

회식.

서늘한 옷자락에서 구역질이 날 정도로 지독한 동물의 냄새가 났다. 태운 듯 씁쓸하고도 톡 쏘는 듯한 냄새는 죽음의 흔적이다. 어쩌면 냄새로라도 옷자락을 붙들어 원망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동물성 단백질로 배를 불린 날에는 아무리 양치질을 해도 입 안에서 쓴내가 가시지 않았던 것처럼. 벗어던지고 싶은 패딩에 얼굴을 묻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입김이 유령처럼 떠돌았고, 나는 두려운 줄도 모르고 짧은 잠을 청했다. 

옷에 밴 고깃내처럼, 우리는 입에 밴 시시껍절한 농담들과 소식들을 나누었다. 언제고 이야깃거리들은 샵과 플랫을 넣었다 빼는 식으로 미묘하게 변주되었지만, 때때로 목젖까지 차오르는 포만감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화제의 익숙함에 모두들 안도한 모습이었다. 새로운 이야기가 등장하게 되는 순간 우리가 전연 다른 관계로 돌변하게 될는지 모른다는 희미한 불안감이 번뜩였고, 금세 말들은 도돌이표처럼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되었다. 벌써 만난지 4년이 되었다는 말이 왠지 불판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무엇같다. 술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았다. 익숙한, 또한 흉물스러운 거리에서 단 맛을 쩝쩝대며 헤어진 것은 가장 잘 한 일이었다. 

언제고 무엇인가 되자고 전망을 나눈 적은 없었으므로 헤어지는 발길 역시 가벼웠는지 모른다. 무엇이 되어 만나자고도 하지 않았다. 실은 무엇이 된다 한들 큰 상관이 없었다. 그저 죄책감을 느낄 것이 없다는 데 대한 죄로, 혹은 추억할 만한 것이 거창하지 않다는 데 대한 죄로 옷깃마다 사역같은 냄새들을 매달고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우리는 결코 면죄부를 얻기 위해 만난 적이 없다. 시간의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죄들은 늘 주름처럼 눈 밑에 열지어 섰으므로. 오히려 우리는 서로의 죄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함께 나이들어 간다는 것이 따스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서로의 온기가 아니라 죄, 그 죄를 확인하던 벌건 불판의 열기 때문일까. 아무렴에야, 따스함에 치뤄야 할 댓가는 며칠은 더 갈 셈이었다. 

토요일, 12월 06, 2008

무너짐.

책들은 쌓이고 또 어그러져 불균질한 포물선을 만들었다. 몇 달 치의 생활을 반증하듯 채 못 본 신문이며 리딩자료들, 발제와 회의기록, 읽다 만 책들 따위에 간간이 영화 팜플렛이나 잡지가 끼어있는 식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마당인 양 침대 위에 그것들을 분류해 두고 나갔다, 다시 집에 돌아와 배치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면 절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읽고 기록해야 할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하는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할수록 하드디스크의 남은 공간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공간활용의 제 1원칙이 버릴 수 있는 것을 다 버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원칙에 충실하기에 나는 퍽 소심한 까닭에 읽지 못한 신문이며 자료들을 아직 낯선 이를 대하듯 조심스레 모셔둘 수밖에 없다. 제 2원칙은 다른 곳에 치워두는 것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미 앉을 의자와 침대 위의 잘 일부의 공간, 몇 발자국 걸어다닐 바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공간은 무언가로 점유된 상태다. 어떤 물건이든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마술같은 능력을 지닌 대개의 엄마들과는 달리, 나는 이 좁다란 공간에서조차 무엇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한참을 헤매곤 한다. 여권이나 카드 같은 것들, 아니면 통장이나 물파스같은 것들을 찾기 위해 고작 팔길이만한 공간을 들쑤시다 손톱만한 바퀴와 만나 서로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나는 오늘처럼 절로 터지는 비명을 꾹 참았다. 바퀴를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들은 결코 새로 들어선 빌딩처럼 반듯하게 차곡차곡 쌓이지 않는다. 언제고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삐뚤빼뚤 제멋대로다. 우리는 늘 그 더미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 패턴에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에 그것을 언제고 호출해 개입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적어도 그것이 서서히 무너져 완만하고 불행한 곡선을 만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내 개입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고작 문제들의 배치일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을 뒤로 배치하면, 적어도 그 문제에 대해 조금은 덜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중요도가 늘 신경증의 정도와 비례할 수야 없는 법이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헛갈려하기 일쑤다. 어쩌면 그래야 무너지는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는지도 모른다.

생선에서 흰 살점을 발라내듯 필요한 것들을 모아 쌓아두고, 나머지엔 원래 가방이 있던 자리를 내어준다. 팔을 뻗을 공간이 조금은 더 늘어난 셈이니, 어쩌면 더 푹 잠이 들 수도 있겠다. 언제까지고 정리를 유예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늘 이 망할 당면한 문제, 당장의 과제와 시험과 잠이 더 중요했던 셈이다. 그래서 그 많은 이들이 일과 글 빚을 지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도 혁명처럼 미뤄진다. 분한 심정도 외로움처럼 여유가 있어야 누릴 수 있는 사치라는 것을 언제 처음 알았던가. 무너진 것들이 만들어낸 아득한 틈새로 발이라도 밀어 넣을 수 있다면야, 하고 말이다. 어쩌면 비명은 참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굴 탓할지도 모른 채 병든 노인네의 볼살처럼 푸욱 하고 꺼져버린 것이다. 언제나 나를 탓하는 일이 가장 간편해서, 오늘도 3분요리를 덥히듯 내 탓이오 버튼을 꾹 하고 눌러 주었다. 

목요일, 12월 04, 2008

말건넴의 윤리, [사과](강이관, 2005)



현정(문소리)은 섹스 후에 늘 잠들어 있는 남자들을 물끄러미 본다. 남자들은 섹스가 끝나면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부치기에 바쁘다. 남자들을 향한 다정한 눈길은 카메라에 의해 두 번이나 포착되지만, 남자들은 응답이 없다.

유사한 좌절은 사실 영화 내내 일종의 패턴을 가지고 반복된다. 변주되는 것이 있다면 현정이 말을 건네는 대상과, 말건넴과 좌절 사이의 주기일 것이다. 민석(이선균)은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건네며 “내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쁜 남자들의 뻔한 대사같던 그 말은 후에 현정이 상훈(김태우)와 결혼한 뒤에야 조금 선명해진다. 천상 자기세계를 침범당하기 싫어하는 남자인 상훈에게 기어이 꽃무늬남방을 입히고, 따분한 교회에 보내는 모습은 마치 현정이 상훈의 세계를 집어 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민석의 말에서 읽어낼 수 있듯 정말 현정은 파괴적인 여자인 것도 같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현정이 남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자,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 그 자체에서 비롯된 마찰이기도 하다. 현정은 가뭄에 콩 나듯 함께 일 이야기를 나누는 술자리 와 동료들 외에는 이렇다할 취미도 친구도 없는 여자이다. 그래서 현정이 대개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과 장소는 가족과 집이다. 존재감없이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과 붙박이장처럼 집구석에 붙어 침잠하는 시간을 제거하고 나면, 이 여자에게 남는 ‘외부’는 남자들과의 시덥잖은 연애뿐이다. 그래서 현정은 그 관계에 모든 것을 건다. 혹은 걸어야 한다는 믿음에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정에게는 직장과 친정도 포기한 채 남편의 전근을 좇아 구미로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남편과의 관계가 그녀에게 있어 세계와의 유일한 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교통체증처럼 막혀 있던 그녀의 마음이, 상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미에서는 얼마간 풀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얼마간은 그녀 스스로의 말건넴이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절의 계기는 계절처럼 다시 찾아온다. 구미로의 전근을 둘러싼 상훈의 거짓말과 무능에 현정은 답답하다. 현정을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상훈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끝내 모른다는 것이다. 현정은 거짓말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지만, 상훈은 자신의 선택의 정당성을 변호할 따름이다. 후에 현정이 이혼 제안을 건넨 뒤 상훈에게 그에 대해 물었을 때 바랐던 것 역시 동의 여부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을 것이다. 현정은 상훈과 자신 사이에 놓여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내는 메커니즘을 알 수 없는 통역기 앞에서 숨이 막힌다.

구미에서 민석의 등장은 새삼스럽다. 말로써 사과를 건네는 것은 민석이지만, 현정은 사과를 사 손에 쥐어 줌으로써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구미에서 돌아와 과장이 되어 있는 현정과 민석의 데이트 씬의 연출은 도드라지게 선명해서, 마치 구미에서의 시간들이 일어나서는 안 될 막되먹은 상상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쨌거나 말건넴과 좌절의 반복 속에서 현정은 집보다 직장에 더 오래 있고, 애인이라는 취미(“너 만나는 게 재미지”)도 생긴 멋드러진 혹은 강한 여자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을 찾은 상훈을 보면서, 이혼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차고 올라와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현정은 어떤 기시감같은 순간을, 혹은 몇 년 전 민석이 자신에게 비슷한 말을 건넬 때의 마음을 단물처럼 혀 끝에 느꼈을 것이다. 너로 인해 내 삶이 끔찍하게 집어삼켜져서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더는 못 버틸 것 같아, 라는. 현정과 민석은 서로 다른 시점에서 유사한 상황에 놓여 유사한 선택을 하는 인물들이다. 상황처럼, 사과 역시도 순차적으로 온다. 민석이 현정에게 사과했듯, 현정도 상훈에게 사과해야 한다. 어찌보면 ‘현정같은’ 여자가 ‘상훈같은’ 남자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처럼 보임에도, 현정이 민석의 마음을 거절한 후 상훈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하는 까닭은 그것이 현정이 믿는 말건넴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남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닫힌 말건넴을 시도하며 그것이 실패할 때에는 침잠할 줄 밖에 모르던 여자가, 그 관계 밖으로 또박또박 걸어나와 자신의 세계와 언어체계를 좌절이나 실패가 아닌 방식으로 번역해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 대한 기술이기도 하다. 그녀는 문을 걸어잠그기보다 상훈을 보듬어 준다. 사과가 그녀의 종착역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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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2월 02, 2008

어떤 불시착.

한 철 장사를 끝낸 이처럼 무겁디 무거운 돈벌이를 그만두고 난 뒤 남은 것은, 기대와 역행하는 더 언로맨틱한 어둑함들이다. 그래도 대개의 저녁시간을 밝은 방 책상 앞에서 끊임없이 떠들다 성마른 목으로 버스와 지하철과 다시 버스를 갈아타며 낡은 방 빗물처럼 새는 졸음을 막느라 애쓰던 때가 조금은 더 사람사는 냄새가 났다. 물론 내가 기대하는 사람사는 냄새란 한껏 편협하고 상상적인 것이어서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그렇다고 집을 나설 때와 돌아올 때 수상스레 달라져 있는 가방의 무게만큼이나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걸음도 무거웠던 것만은, 그 걸음을 정겹고 사람냄새 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종강을 앞두고 불필요한 멜랑콜리아에 푹 맨살을 담그게 되는 것도 같다. 종강의 종강, 이라기엔 끔찍한 겨울학기가 남아 있지만 어쨌거나 정식학기로서는 마지막이니 헛기침을 몇 번 해 줄 법도 하다. 부지런한 시골쥐처럼 빨빨거리며 서울바닥의 재미난 잔칫집들을 쏘다녔고, 가장 상차림이 훌륭했던 데 발을 붙이기로 한 결정에도 쾅쾅 하고 도장이 찍혔다. 대단찮은 일이라고 할 수야 없지만 또 별 일은 별 일인지라 한 마디씩의 격려와 조언의 귀동냥도 두둑이 받았다. 확신과 불안 사이의 변증이 닿은 곳이라면 어떤 선택이건 정당화가능한 것이었던 마냥, 욕심과 겸손도 둘 사이에서 끊임없는 메트로놈 바늘이 오가며 거리를 좁혀 무엇인가가 되려 하는 요즘이다.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몇 개의 자리들에 방석을 들고 훼방을 작심한 불청객마냥 엉덩이를 들이밀게 된다. 발에 본드칠을 한 것이 아닌 이상에야, 어디든 쏘다니는 것이 운이고 명이고 또 낙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불시착과 불시착과 불시착들, 그 거칠은 흔적들을 하나하나 주워가다 보면 어떤 경로들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강변북로를 달리는 차창 새로 들어오는 세찬 바람은 기이하게도 새콤달콤했고,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침묵의 가격을 계산했다. 대개의 관계는 돌이켜보면 그 시작을 떠올리기 힘들도록 서서히 진전되지만, 연애를 포함한 어떤 관계들은 불특정한 사건들과 계기들 속에서 불현듯 떠오르기도 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기회라고 부른다. 

월요일, 12월 01, 2008

성장은 우스운 파국이다, [마음의 속삭임Le Souffle au Coeur](Louis Malle, 1971)


1954년 프랑스, 디종은 평화로운 도시다. 인도차이나를 둘러싼 식민지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어른들의 식사시간의 단골 메뉴인 정치는 현실감이 없다. 불투명하게 돌아가는 세계에서 소년 로랑(Benoit Ferreux)이 정치 대신 선택한 것은 찰리 파커의 재즈며, 헨리 밀러의 문학이며 하는 것들이다. 소년은 세계가 무엇인지, 현실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하지만 현실로부터 온전히 발을 떼기에는 여전히 발돋움이 필요한 나이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레코드판을 훔쳐 듣고, 금서를 읽으며 자위를 한다고 해도 학교에는 늦지 말아야 한다. 종교를 믿지 않을지언정 복사는 서야 하는 것이다. 소년은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존재이다. 합법과 질서의 세계, 그리고 불법과 무질서의 세계. 그러나 소년은 혼란스럽다. 질서 속에서 따스했던 엄마의 품은 사실 소년의 것이 아니라 얼굴 모를 남자의 것이고, 아빠는 소년을 증오한다. 신의 복음을 가르쳐야 할 학교는 군국주의를 내장하고 있으며, 성스러운 신부는 소년들의 성을 탐한다. 로랑에게는 오히려 형들이 보여주는 짓궂은 일탈과 폭력, 외설과 불안정으로 점철된 불법과 무질서의 세계가 더 현실에 가까운 것만 같다. 그러나 두 형들이 종종 흉내내며 로랑을 놀리듯, 이들은 엄마-아빠가 대변하는 질서와 위악이라는 역설에 대한 안티인 동시에 그 상동으로서의 역설을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로랑은 형들이 보여주는 세계에 늪처럼 빠져들며 그들을 존경한다 말하지만, 기실 그들은 로랑의 첫경험을 훼방놓듯 언제고 로랑이 현실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끌어내릴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엄마가 로랑을 언제고 순진무구한 아이로 여김으로써 소년의 재능을 아이의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아이’라는 말은 소년에게 무엇보다 감추고 싶은 오점이다. 소년에게는 모든 종류의 일탈이 다 어른됨, 혹은 ‘아이가 아님’에 대한 인정투쟁인 듯 보인다. 어른됨의 가장 강렬한 핵심에 형들의 그것보다 작은 자신의 성기가 있을 것만 같았던 소년은 엄마로부터의 분리를 다짐하듯 엄마를 안아주고 인사를 나눈 뒤에 형들이 안내한 사창가로 떠난다. 소년이 원했던 것은 따뜻한 키스지만, 손님인 그는 아이처럼 성기를 씻김당한 뒤 키스없는 섹스만을 허용받을뿐이다. 소년이 여자를 안은 모습은 엄마를 안을 때와 닮아 있다. 소년은 엄마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건만, 형들의 도움으로 다시 엄마를 닮은 여자를 안는다. 로랑의 모든 ‘분리’의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것이 부모와 형들에 귀속되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분리가 엄마라는 존재를 우회해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랑은 자살을 까뮈를 읽으며 관념으로만 상상할 뿐, 실천에 옮길 수는 없다. 로랑에게 있어 자살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독립과 선택이 아니라 엄마라는, 그 자신의 성장에서의 핵심으로부터의 도피였기 때문이다.

소년은 엄마와 함께 요양을 떠난다. 아직 열넷인 소년은 여자아이들 앞에서 열다섯이 되었다가, 열여섯이 되었다가 한다. 실제로 소년의 얼굴에서는 점차 어른의 표정이 읽힌다. 소년은 ‘어른처럼’ 거들먹거리고 주문하며 술을 마시는 법을 익혀 나간다. 그럼에도 소년은 해갈되지 않는 무언가를 더듬어낼 수 없다. 엄마가 애인과 잠시 도시를 떠난 사이, 소년은 엄마의 옷을 입고 화장을 해 본다. 소년은 엄마가 가지고 싶다. 하지만 가질 수 없다. 소년은 엄마가 되고 싶다. 하지만 될 수 없다. 거울에 비친 분칠을 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엄마가 될 수는 없다. 어른이 될 수가 없다. 다시 엄마가 돌아오고, 혁명의 날 축제 기간 소년은 엄마와 친구가 되기로 결심한 듯 보인다. 그러나 소년은 어른이 되어야 했다. 성장의 핵심에 다다라야 했다. 엄마는 소년에게 두 번 다리사이를 내어 준 셈이다. 아이로 태어날 때, 그리고 어른이 되려 할 때.

제네바 협정이 맺어졌다는 소식이 들려 오고, 로랑의 어른되기 프로젝트도 끝날 때가 된다. 그 역시도 조국처럼 그가 어른이 되기 위해 필요로 했던 식민지들을 하나씩 떠나보내야 한다. 갑작스레 온 가족들이 모인 그 날 아침, 언제 빚어졌는지도 모를 어떤 불화는 실없는 웃음으로 증발해버린다. 어쩌면 일종의 이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어떤 파국도 우발적으로 찾아와 이리 자연스레 날려보내야 하는 것인 마냥, 영화는 뒤틀어진 세계에서 어른됨이라는 불투명한 투쟁을 완성시킨다. 

토요일, 11월 29, 2008

개꿈들.

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은 틀림없이 등교나 출근을 하는 길일 터였다. 모두가 집에서 나오는 시간, 집으로 역류하려 하니 날선 아침 공기가 저항감처럼 거세게 볼짝을 때렸다. 금요일 오전 대학로의 풍광은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뒤로 남겨진 볼품없는 배경처럼 생기가 없어 뵜다. 내 잠이 모자란 탓일는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하이퍼텍나다는 개장 준비가 먼 것처럼 보였고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토스트를 먹기엔 전날 새벽 채워넣은 단백질덩이들로 속이 쓰렸다. 

조조영화를 보겠다던 야심찬 계획을 철회하고 집으로 오기까지는 당췌 제정신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출근길을 가로막는 귀향민이 어디서인들 환영받을 수 있을까. 4호선 지하철은 몸을 밀어넣을 구석도 없이 가득 차 모두가 모두를 원망하는 기운이 그나마 남은 희미한 공간마저 꾹꾹 눌러 채우고 있었고, 쓰린 속을 달래려 눈을 감으면 그 공간감이 위장을 짓눌러 모든 것을 게워내고 새 공간을 만들고 싶었을 지경이니 말이다.

창가에 말라 비틀어진 이름모를 풀쪼가리처럼 풀썩 하고 침대에 쓰러진 것은 수십 분 뒤였을 것이다. 불법으로 들인 조그만 전기장판에 온기가 들어오기까지도 수 분의 시간이 걸렸다. 정신을 무의식의 세계로 쑤셔넣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음에 틀림없다. 깨었다 다시 자는 잠이 달콤하려면 포즈(pause)가 가능한 한 짧아야 한다는 원칙을 어긴 탓이다. 한참을 뒤척이다 까물 정신을 놓았을 때 펼쳐진 세계는 왠지 현실과 닮고도 달라서, 빛이 어그러져 들어오는 스테인드글라스같기도 하고, 벌써 수 년 전 밤새 플레이하던 RPG의 한 회상장면같기도 했다. 

남성용 무가 주간지 [M25]의 두 페이지에 내가 실려 있다. 내가 이런 표정의 사진들을 찍었던가. 요즘의 울퉁불퉁한 거죽모냥을 생각하면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는, 밉살스럽게 말끔하고 의뭉스런 표정의 사진들은 생뚱맞기 그지 없다. 다른 많은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 왜 내가 실려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 귀퉁이에 실린 문구, "OO라이프와 타협하고 싶은 XX"에 시선이 이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글자 몇 개를 타이핑해 넣을 시간은 고작 몇 초 였으련만, 그 쿨하고 쉬크한 척 돋아나온 활자들이 '폭로'하는 나는 정작 몇 초 쓴웃음을 짓고 잡지를 집어던질 만큼 넉살좋은 인간이 못 된다. 세상은 생각보다 좁은 곳이고, 어떤 사실들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알려질 때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를 종종 낳곤 했던 것을. 나는 왠지 원치않은 기사가 나가 소송을 준비한다던 어떤 여자를 떠올렸고, 왠지 그녀의 전화번호를 더듬었다.

한 번 잠에서 깬다. 견고하진 않지만 든든한 옹벽같은 책과 종이뭉치들의 더미를 감촉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장판에 배를 지지면 속탈이 느슨해질 것만 같다. 엎드려 자는 것은 추천할 만한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왠지 입 안에 이물감이 느껴져 입을 벌리면 이빨 하나가 덩그러니 떨어져 나와 있다. 그 이빨에 붙어 있던 벌레같던 교정기 한 짝도 함께 입 안을 나뒹군다. 벌려진 입 안이 너무 선명히 보이는데, 그것은 왠지 어둑한 지하상가로 연결된 고속터미널 역의 입구를 연상시킨다. 신기하게도 통증은 없었지만, 촉각이 마비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까끌까끌한 그것들의 감촉에 혀끝에 닿을 때마다 정신이 팔짝팔짝 뛰어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 때 전화가 온다. 목소리만 듣고도 나는 왠지 휴대폰 맞은 편의 주인공이 노 수녀님인 것을 번뜩 하고 알게 된다. 나는 이미 목소리로 전화가 이루어지는 맞은 편의 공간을 그려낸다. 아주 오랜만에 연락한 듯한 그녀는 내게 한 달 동안 그 곳, 일테면 일종의 아동보육원에 와 지내라는 부탁을 부탁 아닌 전달조로 건넨다. 나는 이미 이사갈 집이 목동 쪽에 붙어있진 않았던가, 하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우리는 네가 이제 '괜찮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고. 내가 어린 시절을 어디에서 보냈던가. 낯모를 그녀의 목소리가 내가 믿었던 기억들을 먼지뭉치처럼 둘둘 뭉쳐 쓸어담아 버린다.

다시 잠에서 깬다. 혀로 입 안을 더듬어 보니, 몇 달 전 만들어진 빈 자리는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잘 비어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휴대폰을 확인한다. 배터리는 한 칸이, 약속 시간은 1시간이 조금 넘게 남아 있다. 최근 통화기록에는 어제까지의 기록만 남아 있다. 약속 시간을 미루는 문자를 보내고 다시 베개에 고개를 묻는다. 개꿈들이다. 이러니 요즘 생기가 없어뵌단 소릴 듣는다. 

수요일, 11월 26, 2008

소년들의 성장담은 판타지일지도 몰라,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민규동, 2008)


이 영화의 주인공은 너무도 명백하게 김진혁(주지훈)으로 보인다. 그는 갑자기 연 케익점에서 속에 없는 미소를 팔며 많은 손님들을 맞지만, 여전히도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케익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만은 받아들일 수 없어 한다. 마치 그가 어린시절로부터 이름이 바뀌어도 여전히 어린 시절의 끈적이고 스멀거리는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그가 아무리 ‘영감’이라고 불릴 만큼 치밀하고 완벽한 주인장 행세를 하려 해도 그 말끔한 생크림같은 표면을 걷어내면 공허한 빵조각만이 남을 따름이다. 그 속을 과일 칵테일처럼 채우는 것은 뮤지컬이거나 스릴러이며, 진혁은 노래하거나 식은 땀을 흘리며 성장을 끊임없이 유예하는 소년이다.

그에게 있어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로부터 이행한다는 것, 혹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 트라우마로 인해 거부했던 미각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가 거부했던 것이 자신에게 억압과 공포를 행사한 남성이라는 존재일 때, 어른이 되기 위해 그가 받아들여야 할 또 한 가지는 호모섹슈얼리티가 된다. 이처럼 진혁의 성장에서 케이크(미각)와 남자(섹슈얼리티)가 동일한 상징의 두 면이라면, “케이크와 남자는 맛을 봐야 안다!”는 카피는 생각 이상으로 영화의 주제의식을 담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의 전개가 이 ‘애늙은이’의 성장담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진혁은 영화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맛있다’는 표현을 영화의 에필로그에서야, 악몽없는 단 잠에서 깨 모닝담배를 피며 내뱉는다. 그의 성장은 민선우(김재욱)와 자연스레 어깨동무를 나누며 케익을 파는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진혁의 경우처럼 명확히 드러나진 않지만, 기범(유아인)과 수영(최지호)에게 있어서도 성장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다. 단지 케익을 좋아하는 전직 복서였던 기범이 유망한 파티쉐 견습생으로 빠리에 날아가게 되고, 무능하기 짝이 없는 수영이 독립을 선언하게 되는 과정 역시 진혁의 성장담과 맞물려 영화의 플롯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케익을 팔며 성장하는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서 성장하지 않는, 그러니까 ‘이미’ 성장해 있는 유일한 캐릭터는 ‘마성의 게이’인 민선우이다. 일견 민선우는 일본식 하렘물의 성별전환 버전 캐릭터인 것 같지만, 실은 나머지 ‘소년’들의 성장을 지켜보고 토닥이는 일종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유아인에게는 기술로, 최지호에게는 격려와 믿음으로, 진혁에게는 연정과 ‘남는다’는 결정으로. 원작과 이 영화에서 케익만큼이나 화려하게 다루어진 주제라고 할 수 있는 호모섹슈얼리티에 민규동이 부여하고 있는 상징적인 의미는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처음에는 앤티크를 위기에 몰아넣는 무책임한 트러블메이커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고3 때 - 혹은 중3 때 - 이미 더 성장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세상의 쓴 맛을 이미 알아버린 ‘어른’이라는 것. 앤티크의 세계에서 어른은 케익을 ‘단 맛’(진혁)뿐이라고 생각지도 않지만, 탐내고 집착(기범)하지도 않는다. 그저 돈을 위해 만들고 팔 뿐이다. 이는 연애에서도 마찬가지다. 6개월치 월급을 긁어 모아 산 프라다 바지를 입고 클럽에 가서 몸을 흔들고 미소를 날려 남자를 꼬실 경우에도, 함부로 대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집착하지는 않기. 어쩌면 민선우는 성장 이후, 혹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 기실 또 하나의 판타지가 되는 것을 경계하게 하는 현실적인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성장 ‘이후’가 어떤 방식으로 펼쳐질지는 모를 일이다. 성장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또다른 성장의 지점을 물가의 조약돌처럼 밀어내 유예하기 때문이다. 소년들의 앤티크에서의 성장 프로젝트가 종결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이상 앤티크라는 공간은 필요없게 된다. 성장을 위한 조미료같은 뮤지컬과 스릴러와 모자이크식 플롯 전개도 이제는 의미가 없으므로, 영화는 이쯤에서 끝나야 한다. 그래서 갈등이 해소되는 지점은 끝장나게 달콤하기보다 다소 싱겁다. 대개의 케익이 주는 포만감이 그렇듯이.

오늘의 귀가.

컨베이어벨트같은 좁다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오르며 문득 생각한다. 늘 시계를 확인하고, 시간당 벌어들일 임금을 계산하고, 사용하는 비용을 체크하는 바지런하다 못해 바스락거리는 습관. 나는 매일매일 돈을 벌고, 얼굴 한 번 보자 술 한 번 마시자 했던 이들에게 거절을 통보하고, 주먹밥을 사 먹는 사람이다. 지상에 오르니 늘상 그 자리에 있던 버터구이 오징어 가판이 없다. 대신 공기 중엔 희끄무레한 락스 냄새, 아니면 기름 냄새가 바닷 속 오징어처럼 흐느적댔다. 눈이 온다고 했는데, 톡톡거리는 것들은 빗방울이다.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었다. 아마도 피곤해 보인다, 지쳐 보인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겠거니, 하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속일 수 없는 겉가죽의 노화란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지하철 유리에 비친 익숙하디 익숙한 사내아이의 표정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혹은 남자아이, 남자, 남자어른, 성인, 어떤 이름이 가당할지, 그 표정은 성큼 스며든 겨울만큼이나 시리다. 

로맨스를 짓밟히다 못해 정수리까지 파묻힌 그애는 이제 사람을 믿지 않겠다 했고, 나는 친구들을 믿으라 했다. 이야기를 궁색한 목소리로 들어주는 일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게 싫어 입바르고 쉬운 말들만 해결사처럼 늘어놓게 되는 상황이 있다는 것을, 그애도 알고 나도 알았다. 친구들을 믿는다 해서 붙들었던 난간이 10층에서 2층이 되진 않는다는 것도. 미안했다. 광화문 한복판에 컨테이너박스가 서듯 얼토당토 않은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나면 판타지도 현실인 양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또 어쩌면 그래야지만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말짱한 척 슬겅슬겅 살아낼 수 있는 것처럼, 불균질한 풍광들이 덕지덕지 이어진 비탈에서 절룩거리는 우리, 우리는 그저 매일매일 시계를 쏘아보며 번 자질구레한 돈으로 정육점에서의 기름진 만남을 기약할 따름이었던 것을. 

월요일, 11월 24, 2008

과거가 기억되는 폭력적인 방식에 관하여, [이리] (장률, 2008)



지금은 익산이 된 이리역에서 있었던 77년의 폭발사고를 추모하는 문화제가 열리지만, 정작 추모되고 기억되는 것은 그 문화제에 없음을 못박으며 영화는 시작한다. 추모받아야 할 과거는 스스로를 추모할 따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후에 진서(윤진서)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이 경로당의 TV를 통해 잡힐 때에야 알아차리게 된다. 그녀가 느닷없이 카메라 앞에서 하춘화의 노래를 부르고, 구역질을 쏟아내는 것과 같은 불가해한 모습 역시도 과거의 흔적이 대중적인 방식으로 재현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사고 당시 복중에 있었던 진서는 폭발의 자국이며 참사의 흔적이다. 그녀는 잊혀진 과거를 표상하는 존재이다. 진서는 아름답지만,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을 티켓다방 아가씨처럼 자원으로 활용할 줄 모르는 여자다. 그녀에게는 자원이 없다. 성실하게 경로당 바닥을 닦아 내고, 강의실 뒤편으로 새어나오는 중국어를 따라 발음해 보지만 정작 그녀는 모국어로도 필요한 말을 제 때 못 한다. 종종 진서는 계산을 하지 못해 지갑을 째로 내민다. (손상된 계산능력은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기억을 계산하는 능력의 손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바보같은’ 진서는 원장으로부터는 임금을 체불당하고, 학원생과 인근의 남성들로부터 상습적인 강간을 당해 자궁이 손상되곤 한다. 이리 사람들은 이리처럼 진서, 이리의 과거를 착취하고 이용한다.

그녀의 오빠(엄태웅)는 그녀를 안쓰러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바보처럼 당하고 또 당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그녀를 견디지 못해 그녀를 목조른다. 베트남 전우회의 늙은 사내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한 진서의 앙갚음을 위해 그는 전우회의 물건들을 쓸어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녀를 전우회에 대신 보낸 티켓다방 아가씨를 강간하고야 만다. 폭발의 기억이 진서의 몸에 기록되는 것처럼, 상처도 처벌도 여성들의 몸에 가해지는 것이다.

진서에게 언제고 안전과 안정이 불가하듯, 영화에서 재현되는 익산이라는 도시를 가득 메운 어떤 불안정함 - 해소되지 않는 과거의 불가해함과 안정하게 화해하는 일 역시도 불가능한 일인 것만 같다. 옛 애인을 찾아온 할아버지와 오랜만에 꽃단장을 하고 선 할머니의 대화가 침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진서의 몸을 탐하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노인이 자신의 몸을 처벌했던 것처럼. 오히려 우리 사회가 쉽사리 끄집어내 다룰 수 없는 기억을 처리하는 방식은 진서라는 타자의 경험과 피해를 또다른 타자(이주노동자)의 가해로 덧씌우는 것이다.

태웅이 내내 만들던 모형이 30년 전 폭발한 이리역의 모형이라는 사실은, 그 모형에 폭죽이 타들어가 터질 때에서야 선명해진다. 몇 번이고 들판에서 폭발했던 폭죽은 이 폭발의 재현의 전조이다. 때마침 재현되는 것은 MB정권이라는 독재정권의 당선이다. 영화는 30년이 지난 이 곳에서, 기억되는 것은 무엇이며, 변화한 것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진서는 새로 온 중국인 선생에게 중국어로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한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전혀 '바보같지' 않다. 죽었어야 할 그녀의 귀환은, 그저 중국어 학원의 선생이 바뀌는 것처럼 미묘한 변주를 통해 끈질기게 돌아오는 과거의 귀환이다. 이것은 해소되지 않고서는 몇 번의 폭발에도, 몇 번의 살해에도 다시 그 과거를 우리 사회의 기억체계 속으로 불러들여 환기시키고자 하는 영화의 의지이기도 하다.


related reviews: "장률의 '사람들'이 네 번째로 다다른 지옥문 <이리>" (씨네21, 이영진)

토요일, 11월 22, 2008

검은 봉지를 들고 뛰었다.

쥐색 코트 주머니에 손을 그득이 찔러넣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가 선 장소의 정면에 있는 분식집에서는 원색의 버라이어티 쇼가 나오는 TV와, TV는 주시하지 않고 수선을 떨다 물끄러미 밖에 선 나를 쳐다보는 사내아이들 몇몇, 그리고 부산스레 접시를 나르는 주인 아주머니가 gif 파일처럼 미묘한 시간차를 두고 자연스러운 양 움직여댔다. 김이 조금 서린 유리문을 밀치고 들어와 김밥 한 줄에 주먹밥 하나 주세요, 하고 용건을 건넨다. 메시지가 전달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얄팍한 지갑으로 허기를 채우기 딱 좋은 공간에서 느껴지는 적당한 아늑함과 동시에 오래 머무르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이곳을 어서 떠나고자 하는 성급함이 쇼에 나오는 남자 게스트처럼 두리뭉술하게 싱글거리다 사라진다. 나는 삼천 원을 내고 두 종류의 끼니가 담긴 검은 봉지를 받아든다. 

휴대폰에서 표시되는 날씨 정보는 모든 기상관련 정보가 그러하듯 상대적인 값으로만 받아들이고 현실생활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온도는 3도를 가리키고 있지만 보도의 패인 자리마다 살얼음이 번들거리고 있다. 버스는 간발의 차로 떠났다. 연애에서건 여행에서건 버스는 언제고 다시 오게 마련이지만, 마을버스는 기다림의 간격이 짧고 표준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단연 훌륭하다. 봉지 안의 식량이 온기를 잃어가는 것에 조금은 마음아파하며 기다림의 시간을 견딘다. 얼굴짝이 얼어붙어 있으면 시간 역시 더디게 가는 것 같다. 횡단보도 맞은 편의 만두를 파는 트럭에서 부연 김이 냉기와 경합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차피 나누어 먹을 이는 없으므로 지금의 식사 계획에 만족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버스와 함께 온다. 

버스는 결빙의 속박을 뿌리치듯 괴성을 내며 열지어 선 사람들 앞에 섰다. 버스 허리춤치의 좌석에 앉아, 눈을 감고 짧은 졸음을 청하다 간혹 눈을 떠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 안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차림새며 든 것들을 살핀다. 초라한 비닐 봉지나 먹을 것 따위를 든 이는 아무도 없는 늦은 시간이다. 버스가 조금이라도 빨리 출발하기를 바라며 아직 온기를 잃지 않은 밥덩이들을 어루만지다, 왠지 이네들의 열을 빼앗아선 안될 것만 같아 멀찌감치 손을 뗀다. 치밀해봐야 알아주는 이 없는 계산을 하게 되는 것은 버릴 수 없는 습성이다. 버스는 저쯤치에서 턴, 저 사람은 이쯤에서 내린다, 방에 도착하는 시간은 정확하게 몇 분 후. 

버스에서 내려 무단횡단을 한다. 맞은 편 정류장에는 추위에 떨며 서로를 부둥켜 안은, 혹은 서로의 온기를 탐하기 위해 추위 속에 놓인 두 쌍의 연인들이 제각각 서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왠지 내 식량의 온도에 대해 생각한다. 이십육도, 아니면 이십삼도.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탐하는 관계이기보다, 삼십육도의 온기를 유지하기 위해 삼 분 후에 일방적으로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남김없이 먹어치울 파괴적인 관계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열교환법칙 따위를 떠올리는 이 불균등한 관계가 저들의 연애보다 합리적일 것임을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나는 무단횡단을 하는 속도에 가속을 더해 달린다. 손가락에 가느다랗게 걸린 검은 봉지의 무게감이 나쁘지 않다. 

목요일, 11월 20, 2008

첫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개었다. 감쪽같은 거짓말을 보았노라 여기저기 떠벌려도 도무지 드러날 틈새가 없어 졸지에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여전히 바닥에는 축축한 자욱들이 남아있지만, 그조차도 뒤늦게 드리운 햇살의 강력한 침범에 서서히 달아날 채비를 하는 모양새다.

눈이 내리지 않는 동네에서 살았다. 1년에 한 번쯤, 싸락눈같은 눈이 1밀리미터 정도 내리면 온 동네 아이들이 동네로 쏟아져 나와 사위를 헛헛이 가린 가는 눈발에 기뻐하며 자동차 앞 유리에 성에처럼 들러붙은 시꺼먼 눈조각들을 그러모으는 것으로 눈에 대한 호기심과 열망을 달래야 했다. 기억이 선명한데,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시점이 가려진 팩트와 감쪽같은 거짓말이 그렇게 차이가 있던가. 내 손에 회색 눈뭉치가 쥐어져 있었는지, 팔짱을 끼고 쌓이자 마자 녹아내리는 눈더미를 딛고 서서 꼬마애들의 모양새를 남인양 지켜보고 있었는지 - 그 모든 풍경들이 따갑게 가는 눈발에 쓸려 나가는 것만 같다. 혹은, 징그럽게 밝은 태양빛이 쪼여들어 기억들을 하얗게 지워내는 것도 같다.

서울에서 네 번째 겨울을 맞는다. 소회랄 것은 없지만, 말없이 속에 쌓인 것들은 차고 넘칠 것이다. 오래 산 집에서 쓸만한 것들을 골라 이사를 하듯, 켜켜이 누적된 사건들 속에서 당장의 한 발을 더 내딛기 위해 절실한 것들을 황급히 주워 담아 휘휘 털어 이것이 내 것이었노라고, 이게 지금의 나를 보여주는 소중한 증거라고 내놓는다. 간혹 반례가 들끓어 올라 내 현실에 뜨거운 물을 할딱할딱 튀길 때, 의 기시감같은 순간들이 있는 법이다. 서울에서 보낸 계절의 숫자를 헤아리면서 내가 입다무는, 혹은 이미 뱃속으로 꺼져버린 어떤 것들의 영양함량 따위를 기억해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하는 물음은 그래서 감쪽같은 거짓말에 대한 물음같다. 거짓말의 대상과 거짓말의 주체가 동일하므로, 진실을 답해줄 이는 스스로일 수 없다.

졸음이 햇살처럼 파고드는 오후이나, 이 오후도 곧 사위어 갈 것이다. 거짓말의 품 속으로 파고들면 조금은 체온이 덥혀질 듯도 싶다. 첫눈오는 날의 미덕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월요일, 11월 17, 2008

1st.

무너진 집과 빚더미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기분이랄까.
여전히 빚은 많지만, 집들이는 해야지요. 안녕, 발자국을 남겨주길. :-/

이사.

온 방 안이 난장판이었던 지도 벌써 9개월 째, 곧 심상찮은 생명체가 불쑥 하고 튀어나온 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간이다. 한 달에 책무덤이 하나씩 솟아났고, 때로 그것들은 무너지고 포개어져 일그러진 둔덕을 만들었다. 채 다 읽지도 못한 종잇장들이 침대를 침범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밤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낮에는 안간힘을 다해 내 선택들에 당당해질 수 있었건만, 침대에 누울 때만은 최대한 몸을 웅크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사를 계획 중이다. 계획은 언제나 모 아니면 도, 와르르 무너지거나 아니면 착착 정리해 컴플릿, 인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여러 개의 이사가 한꺼번에 '왔다'. 이제는 떠날 때도 되었다고 읊조리며 걸음을 옮기다 보면 쓴 침이 입에 고이는 캠퍼스도, 그렇게 걷다 어느새 당도하게 되는 수백의 사내들이 모여 사는 수선한 기숙사도, 천천히 작별을 고할라치면 지령처럼 발목을 붙드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어제는 새로 자리잡을 곳들을 방문했다. 5511번 버스가 몇 번 둥실, 하고 떠오른 뒤 내릴 수 있는 곳. 아직은 문과대학으로 가는 몇 안 되는 길이 처음 나기 시작한 수염처럼 그저 낯설고 또 낯설기만 한 캠퍼스에는 유달리 빛이 들지 않았다. 이상스레 모여든 사람들과, 자판기 커피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강의실의 냉기에 떨며 졸았다. 차례는 늦게 왔다. 낯설지 않은 교수들 사이에서도 알 만한 냉기가 감돌았다. 뽑을 사람은 적고, 지원한 이는 많으니 희망을 너무 크게 줘선 안 되는 것이 교수들의 롤플레이일 테지. 혀가 굳었는지 몇 번이나 말이 꼬였고, 속에선 지원서에 쓴 말들과 이 대학에 지원하는 것과 관련해 만났던 적지 않은 이들과 나눈 여러 대화들이 빙빙 꼬여 부글부글 끓다 포말처럼 몇 마디가 튀어나가기도 했다. 얼간이처럼 팔과 다리를 한꺼번에 들어 올렸다 내리며 걸어 나와 다시 5511번 버스를 타니 그것들이 한꺼번에 파리떼처럼 기억에 몰려들어 얼굴만 달아 올라야 했던 것이다. 대개의 면접이 그러하듯이, 또는 대개의 면접수험생이 그러하듯이. 왠지 하루 걸러 하루 면접시험을 보고,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요상한 시기를 살아내는 친구들의 얼굴들이 봉천고개 너머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또 한 곳은 이사해 살게 될 집이다. 집, 집, 집. 친구들은 언제나 내가 집, 이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움찔하곤 했다. 고향에 내려가는 일은 일 년에 두어 번 될까말까 한 놈이 눅눅한 기숙사 방구석을 집이라고 이르는 일이 낯설었던 탓일테다. 그래도 4년을 살았다. 명절과 크리스마스를 낀 연말을 제외하곤 언제나 갖은 사람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빨래를 하고, 축구를 하고, 라면을 사 먹고, 탕수육을 시켜 먹고, 밤을 새곤 하던 곳. 새벽 여섯 시면 청소부 아저씨가 하루동안 쌓인 방대한 쓰레기를 꾸역꾸역 담고, 열 시면 화장실과 샤워실을 물범벅으로 만들어 놓는 곳. 나는 내 방과 더불어 그 외의 모든 부대시설들을 집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래야 오 센티 벽을 두고 사는 이와 인사를 모르고 살아도 정을 붙이고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민간기업에 위탁해 새로 들어설 건물들을 위해 공사가 시작되고, 철갑같은 회색 벽들이 둘러쌀 때 나는 정말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무엇이고 파괴하고 보는 곳이고, 흔적이며 잔해를 용서하지 않는 동네다.

친구와 함께 구불구불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또 걸어 간 곳은 기대보다 다부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허름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엔 외떨어진 화장실 겸 욕실이 있고, 정면의 문 안으로 걸어 내려가 보이는 반지하의 작은 공간이 앞으로 내가 살게 될 곳이라고 했다. 한 평 남짓한 부엌을 중심으로 안쪽에는 서재로 쓰면 딱 좋을 아주 작은 방 하나, 측면에는 네다섯 평 쯤은 되어 보이는 방이 있다. 보관을 위해 덩그러니 놓여진 단단한 감촉의 흔들의자에 앉아 두런두런 도배와 가구와 배치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왠지 이 방과 악수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습기가 퍼렇게 슨 아랫벽들까지도 나는 서슴없이 반가워했다.

또 하나의 이사는 아마도 이 곳으로의 이사일 것이다. 몇 번이고 싸이월드의 좁은 방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지만, 본디 종속은 달콤한 굴종의 쾌를 선사하는 법이기에 선뜻 떨쳐 나오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발자국이 닿은 블로그만 여럿이었고,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고 언제나 침대에 풀썩 쓰러지듯 싸이월드의 좁은 방에 토로하는 것을 익숙해 했다. 그저 생각보다 gmail이 쓸만했던 탓이기도 하고, 생각보다 이 곳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정성껏 새로운 툴을 익혀 칠과 도배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 시간 동안 로그인이 먹통이었던 멍청하고 무겁게 달뜬 싸이월드에 질린 탓이기도 하다. 원래 새로운 선택지는 모르는 사이에 불쑥, 하고 찾아오는 손님 같은 것이고, 결정은 예스 오어 노,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확인이나 의심이나 본디 취약한 것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건 그 쾌를, 그 불안을, 사랑하고 껴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므로, 여러 의미의 안녕을 고하고 또 시작한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