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1월 24, 2008

과거가 기억되는 폭력적인 방식에 관하여, [이리] (장률, 2008)



지금은 익산이 된 이리역에서 있었던 77년의 폭발사고를 추모하는 문화제가 열리지만, 정작 추모되고 기억되는 것은 그 문화제에 없음을 못박으며 영화는 시작한다. 추모받아야 할 과거는 스스로를 추모할 따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후에 진서(윤진서)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습이 경로당의 TV를 통해 잡힐 때에야 알아차리게 된다. 그녀가 느닷없이 카메라 앞에서 하춘화의 노래를 부르고, 구역질을 쏟아내는 것과 같은 불가해한 모습 역시도 과거의 흔적이 대중적인 방식으로 재현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단서이다.

사고 당시 복중에 있었던 진서는 폭발의 자국이며 참사의 흔적이다. 그녀는 잊혀진 과거를 표상하는 존재이다. 진서는 아름답지만, 자신이 가진 성적 매력을 티켓다방 아가씨처럼 자원으로 활용할 줄 모르는 여자다. 그녀에게는 자원이 없다. 성실하게 경로당 바닥을 닦아 내고, 강의실 뒤편으로 새어나오는 중국어를 따라 발음해 보지만 정작 그녀는 모국어로도 필요한 말을 제 때 못 한다. 종종 진서는 계산을 하지 못해 지갑을 째로 내민다. (손상된 계산능력은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기억을 계산하는 능력의 손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바보같은’ 진서는 원장으로부터는 임금을 체불당하고, 학원생과 인근의 남성들로부터 상습적인 강간을 당해 자궁이 손상되곤 한다. 이리 사람들은 이리처럼 진서, 이리의 과거를 착취하고 이용한다.

그녀의 오빠(엄태웅)는 그녀를 안쓰러워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바보처럼 당하고 또 당해도 아픈 줄을 모르는 그녀를 견디지 못해 그녀를 목조른다. 베트남 전우회의 늙은 사내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한 진서의 앙갚음을 위해 그는 전우회의 물건들을 쓸어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녀를 전우회에 대신 보낸 티켓다방 아가씨를 강간하고야 만다. 폭발의 기억이 진서의 몸에 기록되는 것처럼, 상처도 처벌도 여성들의 몸에 가해지는 것이다.

진서에게 언제고 안전과 안정이 불가하듯, 영화에서 재현되는 익산이라는 도시를 가득 메운 어떤 불안정함 - 해소되지 않는 과거의 불가해함과 안정하게 화해하는 일 역시도 불가능한 일인 것만 같다. 옛 애인을 찾아온 할아버지와 오랜만에 꽃단장을 하고 선 할머니의 대화가 침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진서의 몸을 탐하고자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노인이 자신의 몸을 처벌했던 것처럼. 오히려 우리 사회가 쉽사리 끄집어내 다룰 수 없는 기억을 처리하는 방식은 진서라는 타자의 경험과 피해를 또다른 타자(이주노동자)의 가해로 덧씌우는 것이다.

태웅이 내내 만들던 모형이 30년 전 폭발한 이리역의 모형이라는 사실은, 그 모형에 폭죽이 타들어가 터질 때에서야 선명해진다. 몇 번이고 들판에서 폭발했던 폭죽은 이 폭발의 재현의 전조이다. 때마침 재현되는 것은 MB정권이라는 독재정권의 당선이다. 영화는 30년이 지난 이 곳에서, 기억되는 것은 무엇이며, 변화한 것은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진서는 새로 온 중국인 선생에게 중국어로 인사를 건네며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한다. 이 장면에서 그녀는 전혀 '바보같지' 않다. 죽었어야 할 그녀의 귀환은, 그저 중국어 학원의 선생이 바뀌는 것처럼 미묘한 변주를 통해 끈질기게 돌아오는 과거의 귀환이다. 이것은 해소되지 않고서는 몇 번의 폭발에도, 몇 번의 살해에도 다시 그 과거를 우리 사회의 기억체계 속으로 불러들여 환기시키고자 하는 영화의 의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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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1. 어야 할 그녀의 귀환은, 그저 중국어 학원의 선생이 바뀌는 것처럼 미묘한 변주를 통해 끈질기게 돌아오는 과거의 귀환이다. 이것은 해소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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