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1월 17, 2008

이사.

온 방 안이 난장판이었던 지도 벌써 9개월 째, 곧 심상찮은 생명체가 불쑥 하고 튀어나온 대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간이다. 한 달에 책무덤이 하나씩 솟아났고, 때로 그것들은 무너지고 포개어져 일그러진 둔덕을 만들었다. 채 다 읽지도 못한 종잇장들이 침대를 침범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밤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낮에는 안간힘을 다해 내 선택들에 당당해질 수 있었건만, 침대에 누울 때만은 최대한 몸을 웅크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사를 계획 중이다. 계획은 언제나 모 아니면 도, 와르르 무너지거나 아니면 착착 정리해 컴플릿, 인 거라는 생각 때문인지 여러 개의 이사가 한꺼번에 '왔다'. 이제는 떠날 때도 되었다고 읊조리며 걸음을 옮기다 보면 쓴 침이 입에 고이는 캠퍼스도, 그렇게 걷다 어느새 당도하게 되는 수백의 사내들이 모여 사는 수선한 기숙사도, 천천히 작별을 고할라치면 지령처럼 발목을 붙드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어제는 새로 자리잡을 곳들을 방문했다. 5511번 버스가 몇 번 둥실, 하고 떠오른 뒤 내릴 수 있는 곳. 아직은 문과대학으로 가는 몇 안 되는 길이 처음 나기 시작한 수염처럼 그저 낯설고 또 낯설기만 한 캠퍼스에는 유달리 빛이 들지 않았다. 이상스레 모여든 사람들과, 자판기 커피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강의실의 냉기에 떨며 졸았다. 차례는 늦게 왔다. 낯설지 않은 교수들 사이에서도 알 만한 냉기가 감돌았다. 뽑을 사람은 적고, 지원한 이는 많으니 희망을 너무 크게 줘선 안 되는 것이 교수들의 롤플레이일 테지. 혀가 굳었는지 몇 번이나 말이 꼬였고, 속에선 지원서에 쓴 말들과 이 대학에 지원하는 것과 관련해 만났던 적지 않은 이들과 나눈 여러 대화들이 빙빙 꼬여 부글부글 끓다 포말처럼 몇 마디가 튀어나가기도 했다. 얼간이처럼 팔과 다리를 한꺼번에 들어 올렸다 내리며 걸어 나와 다시 5511번 버스를 타니 그것들이 한꺼번에 파리떼처럼 기억에 몰려들어 얼굴만 달아 올라야 했던 것이다. 대개의 면접이 그러하듯이, 또는 대개의 면접수험생이 그러하듯이. 왠지 하루 걸러 하루 면접시험을 보고,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는 요상한 시기를 살아내는 친구들의 얼굴들이 봉천고개 너머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또 한 곳은 이사해 살게 될 집이다. 집, 집, 집. 친구들은 언제나 내가 집, 이라는 표현을 쓸 때마다 움찔하곤 했다. 고향에 내려가는 일은 일 년에 두어 번 될까말까 한 놈이 눅눅한 기숙사 방구석을 집이라고 이르는 일이 낯설었던 탓일테다. 그래도 4년을 살았다. 명절과 크리스마스를 낀 연말을 제외하곤 언제나 갖은 사람들이 비슷한 모습으로 빨래를 하고, 축구를 하고, 라면을 사 먹고, 탕수육을 시켜 먹고, 밤을 새곤 하던 곳. 새벽 여섯 시면 청소부 아저씨가 하루동안 쌓인 방대한 쓰레기를 꾸역꾸역 담고, 열 시면 화장실과 샤워실을 물범벅으로 만들어 놓는 곳. 나는 내 방과 더불어 그 외의 모든 부대시설들을 집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래야 오 센티 벽을 두고 사는 이와 인사를 모르고 살아도 정을 붙이고 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민간기업에 위탁해 새로 들어설 건물들을 위해 공사가 시작되고, 철갑같은 회색 벽들이 둘러쌀 때 나는 정말로 떠날 때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무엇이고 파괴하고 보는 곳이고, 흔적이며 잔해를 용서하지 않는 동네다.

친구와 함께 구불구불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또 걸어 간 곳은 기대보다 다부진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허름한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오른쪽엔 외떨어진 화장실 겸 욕실이 있고, 정면의 문 안으로 걸어 내려가 보이는 반지하의 작은 공간이 앞으로 내가 살게 될 곳이라고 했다. 한 평 남짓한 부엌을 중심으로 안쪽에는 서재로 쓰면 딱 좋을 아주 작은 방 하나, 측면에는 네다섯 평 쯤은 되어 보이는 방이 있다. 보관을 위해 덩그러니 놓여진 단단한 감촉의 흔들의자에 앉아 두런두런 도배와 가구와 배치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왠지 이 방과 악수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습기가 퍼렇게 슨 아랫벽들까지도 나는 서슴없이 반가워했다.

또 하나의 이사는 아마도 이 곳으로의 이사일 것이다. 몇 번이고 싸이월드의 좁은 방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했지만, 본디 종속은 달콤한 굴종의 쾌를 선사하는 법이기에 선뜻 떨쳐 나오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발자국이 닿은 블로그만 여럿이었고, 게으름을 이기지 못하고 언제나 침대에 풀썩 쓰러지듯 싸이월드의 좁은 방에 토로하는 것을 익숙해 했다. 그저 생각보다 gmail이 쓸만했던 탓이기도 하고, 생각보다 이 곳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정성껏 새로운 툴을 익혀 칠과 도배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 시간 동안 로그인이 먹통이었던 멍청하고 무겁게 달뜬 싸이월드에 질린 탓이기도 하다. 원래 새로운 선택지는 모르는 사이에 불쑥, 하고 찾아오는 손님 같은 것이고, 결정은 예스 오어 노,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확인이나 의심이나 본디 취약한 것이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건 그 쾌를, 그 불안을, 사랑하고 껴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므로, 여러 의미의 안녕을 고하고 또 시작한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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