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히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은 틀림없이 등교나 출근을 하는 길일 터였다. 모두가 집에서 나오는 시간, 집으로 역류하려 하니 날선 아침 공기가 저항감처럼 거세게 볼짝을 때렸다. 금요일 오전 대학로의 풍광은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뒤로 남겨진 볼품없는 배경처럼 생기가 없어 뵜다. 내 잠이 모자란 탓일는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하이퍼텍나다는 개장 준비가 먼 것처럼 보였고 나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토스트를 먹기엔 전날 새벽 채워넣은 단백질덩이들로 속이 쓰렸다.
조조영화를 보겠다던 야심찬 계획을 철회하고 집으로 오기까지는 당췌 제정신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출근길을 가로막는 귀향민이 어디서인들 환영받을 수 있을까. 4호선 지하철은 몸을 밀어넣을 구석도 없이 가득 차 모두가 모두를 원망하는 기운이 그나마 남은 희미한 공간마저 꾹꾹 눌러 채우고 있었고, 쓰린 속을 달래려 눈을 감으면 그 공간감이 위장을 짓눌러 모든 것을 게워내고 새 공간을 만들고 싶었을 지경이니 말이다.
창가에 말라 비틀어진 이름모를 풀쪼가리처럼 풀썩 하고 침대에 쓰러진 것은 수십 분 뒤였을 것이다. 불법으로 들인 조그만 전기장판에 온기가 들어오기까지도 수 분의 시간이 걸렸다. 정신을 무의식의 세계로 쑤셔넣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음에 틀림없다. 깨었다 다시 자는 잠이 달콤하려면 포즈(pause)가 가능한 한 짧아야 한다는 원칙을 어긴 탓이다. 한참을 뒤척이다 까물 정신을 놓았을 때 펼쳐진 세계는 왠지 현실과 닮고도 달라서, 빛이 어그러져 들어오는 스테인드글라스같기도 하고, 벌써 수 년 전 밤새 플레이하던 RPG의 한 회상장면같기도 했다.
남성용 무가 주간지 [M25]의 두 페이지에 내가 실려 있다. 내가 이런 표정의 사진들을 찍었던가. 요즘의 울퉁불퉁한 거죽모냥을 생각하면 왜곡도 이런 왜곡이 없는, 밉살스럽게 말끔하고 의뭉스런 표정의 사진들은 생뚱맞기 그지 없다. 다른 많은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기에 왜 내가 실려 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한 귀퉁이에 실린 문구, "OO라이프와 타협하고 싶은 XX"에 시선이 이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글자 몇 개를 타이핑해 넣을 시간은 고작 몇 초 였으련만, 그 쿨하고 쉬크한 척 돋아나온 활자들이 '폭로'하는 나는 정작 몇 초 쓴웃음을 짓고 잡지를 집어던질 만큼 넉살좋은 인간이 못 된다. 세상은 생각보다 좁은 곳이고, 어떤 사실들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알려질 때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를 종종 낳곤 했던 것을. 나는 왠지 원치않은 기사가 나가 소송을 준비한다던 어떤 여자를 떠올렸고, 왠지 그녀의 전화번호를 더듬었다.
한 번 잠에서 깬다. 견고하진 않지만 든든한 옹벽같은 책과 종이뭉치들의 더미를 감촉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장판에 배를 지지면 속탈이 느슨해질 것만 같다. 엎드려 자는 것은 추천할 만한 일이 못 된다고 생각한다. 왠지 입 안에 이물감이 느껴져 입을 벌리면 이빨 하나가 덩그러니 떨어져 나와 있다. 그 이빨에 붙어 있던 벌레같던 교정기 한 짝도 함께 입 안을 나뒹군다. 벌려진 입 안이 너무 선명히 보이는데, 그것은 왠지 어둑한 지하상가로 연결된 고속터미널 역의 입구를 연상시킨다. 신기하게도 통증은 없었지만, 촉각이 마비된 것은 아니었으므로 까끌까끌한 그것들의 감촉에 혀끝에 닿을 때마다 정신이 팔짝팔짝 뛰어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 때 전화가 온다. 목소리만 듣고도 나는 왠지 휴대폰 맞은 편의 주인공이 노 수녀님인 것을 번뜩 하고 알게 된다. 나는 이미 목소리로 전화가 이루어지는 맞은 편의 공간을 그려낸다. 아주 오랜만에 연락한 듯한 그녀는 내게 한 달 동안 그 곳, 일테면 일종의 아동보육원에 와 지내라는 부탁을 부탁 아닌 전달조로 건넨다. 나는 이미 이사갈 집이 목동 쪽에 붙어있진 않았던가, 하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진다. 우리는 네가 이제 '괜찮은지'를 살펴보려고 한다고. 내가 어린 시절을 어디에서 보냈던가. 낯모를 그녀의 목소리가 내가 믿었던 기억들을 먼지뭉치처럼 둘둘 뭉쳐 쓸어담아 버린다.
다시 잠에서 깬다. 혀로 입 안을 더듬어 보니, 몇 달 전 만들어진 빈 자리는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고 잘 비어있다.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휴대폰을 확인한다. 배터리는 한 칸이, 약속 시간은 1시간이 조금 넘게 남아 있다. 최근 통화기록에는 어제까지의 기록만 남아 있다. 약속 시간을 미루는 문자를 보내고 다시 베개에 고개를 묻는다. 개꿈들이다. 이러니 요즘 생기가 없어뵌단 소릴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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