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12월 04, 2008

말건넴의 윤리, [사과](강이관, 2005)



현정(문소리)은 섹스 후에 늘 잠들어 있는 남자들을 물끄러미 본다. 남자들은 섹스가 끝나면 조금이라도 더 눈을 부치기에 바쁘다. 남자들을 향한 다정한 눈길은 카메라에 의해 두 번이나 포착되지만, 남자들은 응답이 없다.

유사한 좌절은 사실 영화 내내 일종의 패턴을 가지고 반복된다. 변주되는 것이 있다면 현정이 말을 건네는 대상과, 말건넴과 좌절 사이의 주기일 것이다. 민석(이선균)은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건네며 “내가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쁜 남자들의 뻔한 대사같던 그 말은 후에 현정이 상훈(김태우)와 결혼한 뒤에야 조금 선명해진다. 천상 자기세계를 침범당하기 싫어하는 남자인 상훈에게 기어이 꽃무늬남방을 입히고, 따분한 교회에 보내는 모습은 마치 현정이 상훈의 세계를 집어 삼키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민석의 말에서 읽어낼 수 있듯 정말 현정은 파괴적인 여자인 것도 같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현정이 남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자, 세계와 관계맺는 방식 그 자체에서 비롯된 마찰이기도 하다. 현정은 가뭄에 콩 나듯 함께 일 이야기를 나누는 술자리 와 동료들 외에는 이렇다할 취미도 친구도 없는 여자이다. 그래서 현정이 대개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과 장소는 가족과 집이다. 존재감없이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과 붙박이장처럼 집구석에 붙어 침잠하는 시간을 제거하고 나면, 이 여자에게 남는 ‘외부’는 남자들과의 시덥잖은 연애뿐이다. 그래서 현정은 그 관계에 모든 것을 건다. 혹은 걸어야 한다는 믿음에 단 한 번도 의문을 제기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현정에게는 직장과 친정도 포기한 채 남편의 전근을 좇아 구미로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남편과의 관계가 그녀에게 있어 세계와의 유일한 끈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교통체증처럼 막혀 있던 그녀의 마음이, 상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구미에서는 얼마간 풀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얼마간은 그녀 스스로의 말건넴이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에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좌절의 계기는 계절처럼 다시 찾아온다. 구미로의 전근을 둘러싼 상훈의 거짓말과 무능에 현정은 답답하다. 현정을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상훈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끝내 모른다는 것이다. 현정은 거짓말에 대한 사과를 받고 싶지만, 상훈은 자신의 선택의 정당성을 변호할 따름이다. 후에 현정이 이혼 제안을 건넨 뒤 상훈에게 그에 대해 물었을 때 바랐던 것 역시 동의 여부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을 것이다. 현정은 상훈과 자신 사이에 놓여 끊임없이 자신의 말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내는 메커니즘을 알 수 없는 통역기 앞에서 숨이 막힌다.

구미에서 민석의 등장은 새삼스럽다. 말로써 사과를 건네는 것은 민석이지만, 현정은 사과를 사 손에 쥐어 줌으로써 다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구미에서 돌아와 과장이 되어 있는 현정과 민석의 데이트 씬의 연출은 도드라지게 선명해서, 마치 구미에서의 시간들이 일어나서는 안 될 막되먹은 상상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어쨌거나 말건넴과 좌절의 반복 속에서 현정은 집보다 직장에 더 오래 있고, 애인이라는 취미(“너 만나는 게 재미지”)도 생긴 멋드러진 혹은 강한 여자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을 찾은 상훈을 보면서, 이혼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꾸역꾸역 차고 올라와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현정은 어떤 기시감같은 순간을, 혹은 몇 년 전 민석이 자신에게 비슷한 말을 건넬 때의 마음을 단물처럼 혀 끝에 느꼈을 것이다. 너로 인해 내 삶이 끔찍하게 집어삼켜져서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아, 더는 못 버틸 것 같아, 라는. 현정과 민석은 서로 다른 시점에서 유사한 상황에 놓여 유사한 선택을 하는 인물들이다. 상황처럼, 사과 역시도 순차적으로 온다. 민석이 현정에게 사과했듯, 현정도 상훈에게 사과해야 한다. 어찌보면 ‘현정같은’ 여자가 ‘상훈같은’ 남자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처럼 보임에도, 현정이 민석의 마음을 거절한 후 상훈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하는 까닭은 그것이 현정이 믿는 말건넴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남자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닫힌 말건넴을 시도하며 그것이 실패할 때에는 침잠할 줄 밖에 모르던 여자가, 그 관계 밖으로 또박또박 걸어나와 자신의 세계와 언어체계를 좌절이나 실패가 아닌 방식으로 번역해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 대한 기술이기도 하다. 그녀는 문을 걸어잠그기보다 상훈을 보듬어 준다. 사과가 그녀의 종착역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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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개:

  1. 여 유사한 선택을 하는 인물들이다. 상황처럼, 사과 역시도 순차적으로 온다. 민석이 현정에게 사과했듯, 현정도 상훈에게 사과해야 한다. 어찌보면 ‘현정같은’ 여자가 ‘상훈같은’ 남자에게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처럼 보임에도, 현정이 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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