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들은 쌓이고 또 어그러져 불균질한 포물선을 만들었다. 몇 달 치의 생활을 반증하듯 채 못 본 신문이며 리딩자료들, 발제와 회의기록, 읽다 만 책들 따위에 간간이 영화 팜플렛이나 잡지가 끼어있는 식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마당인 양 침대 위에 그것들을 분류해 두고 나갔다, 다시 집에 돌아와 배치의 시간을 맞이하게 되면 절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읽고 기록해야 할 것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증가하는 것이다. 컴퓨터를 사용할수록 하드디스크의 남은 공간이 줄어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공간활용의 제 1원칙이 버릴 수 있는 것을 다 버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원칙에 충실하기에 나는 퍽 소심한 까닭에 읽지 못한 신문이며 자료들을 아직 낯선 이를 대하듯 조심스레 모셔둘 수밖에 없다. 제 2원칙은 다른 곳에 치워두는 것이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이미 앉을 의자와 침대 위의 잘 일부의 공간, 몇 발자국 걸어다닐 바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공간은 무언가로 점유된 상태다. 어떤 물건이든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마술같은 능력을 지닌 대개의 엄마들과는 달리, 나는 이 좁다란 공간에서조차 무엇을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한참을 헤매곤 한다. 여권이나 카드 같은 것들, 아니면 통장이나 물파스같은 것들을 찾기 위해 고작 팔길이만한 공간을 들쑤시다 손톱만한 바퀴와 만나 서로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나는 오늘처럼 절로 터지는 비명을 꾹 참았다. 바퀴를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들은 결코 새로 들어선 빌딩처럼 반듯하게 차곡차곡 쌓이지 않는다. 언제고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삐뚤빼뚤 제멋대로다. 우리는 늘 그 더미에 일정한 패턴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 패턴에 익숙해져 있다는 생각에 그것을 언제고 호출해 개입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적어도 그것이 서서히 무너져 완만하고 불행한 곡선을 만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내 개입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고작 문제들의 배치일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을 뒤로 배치하면, 적어도 그 문제에 대해 조금은 덜 고민할 수 있게 된다. 중요도가 늘 신경증의 정도와 비례할 수야 없는 법이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헛갈려하기 일쑤다. 어쩌면 그래야 무너지는 속도를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는지도 모른다.
생선에서 흰 살점을 발라내듯 필요한 것들을 모아 쌓아두고, 나머지엔 원래 가방이 있던 자리를 내어준다. 팔을 뻗을 공간이 조금은 더 늘어난 셈이니, 어쩌면 더 푹 잠이 들 수도 있겠다. 언제까지고 정리를 유예할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늘 이 망할 당면한 문제, 당장의 과제와 시험과 잠이 더 중요했던 셈이다. 그래서 그 많은 이들이 일과 글 빚을 지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도 혁명처럼 미뤄진다. 분한 심정도 외로움처럼 여유가 있어야 누릴 수 있는 사치라는 것을 언제 처음 알았던가. 무너진 것들이 만들어낸 아득한 틈새로 발이라도 밀어 넣을 수 있다면야, 하고 말이다. 어쩌면 비명은 참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굴 탓할지도 모른 채 병든 노인네의 볼살처럼 푸욱 하고 꺼져버린 것이다. 언제나 나를 탓하는 일이 가장 간편해서, 오늘도 3분요리를 덥히듯 내 탓이오 버튼을 꾹 하고 눌러 주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