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찾지 않는다 한들 아무 이야기나 써갈길 수야 없는 노릇이라고 생각하매, 몇 날을 끙끙 앓으며 글의 초입을 썼다 또 지우기를 몇 차례다. 마음에 차는 이야깃거리가 없는 것이라기보다 무슨 말이라도 끄집어내기가 참 피로한 탓일게다. 외려 인적드문 곳에서 발가벗겨질 것이 두렵고, 초조하고 군살많은 속내를 들킬 것 역시 창피한 까닭이다. 고민이랄 것도 없이 시간을 낭비하다 종국에 지워지는 것은 쓰던 글이라기보다는 속에서 뜨거운 입김처럼 들끓던 무엇이다. 표정없는 사진처럼 쓰여지다 만 감정들은 침침히 가라앉아 아랫배를 묵직하게 짓누르곤 했다.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서도 비워지지 않는 그것들은 밤이 되면 신경을 자극하다 다시 부옇게 제자리로 돌아가길 반복한다.
지금보다 절실한 것들이 많았던 때에 대해 생각한다. 절실함의 뒷면에는 언제나 치명적인 위험이 독풀처럼 고개를 까닥이고 있었고, 해독없는 고통은 절실한 그것 이외의 무엇도 욕망하거나 원망할 수 없게 했다. 매일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글을 남기지 않고서는 목젖을 누르는 압력을 감당할 수 없었을 시절이다. 손꼽을 만큼 간절했던 것은 단지 하루하루의 나를 승인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삼키고 무엇이든 회개할 터이니 오늘도 전등 꺼진 방에서 꺼이꺼이 울음하는 것으로 죽음을 대신하고 살자고, 유령처럼 걸린 몸에 맞지 않는 교복을 벗고 나서는 내가 무엇이건 나를 놓아주겠노라고.
박차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무엇으로부터였는지는 쉬이 가늠할 수 없다. 여전히 때로는 절실한 것들이 불쑥 방문하며, 불 꺼진 방에서 오래도록 잠자코 앉아 있기도 한다. 차이가 있다면 가시적인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서지 않는 경우에는 가스 밸브를 잠그듯 철저히 그 허무맹랑한 열망을 짓누르는데 익숙해 졌으며, 어둔 방에서 절로 터지던 울음이 냉소와 피로가 되었다는 점일테다. 바라는 것도, 증오하는 것도, 달아나는 것도, 위로하는 것도 참으로 피로한 일이다. 수선스럽게 속을 걷어차던 마음들도 실은 피로의 충실한 심복이며, 그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또 말을 잊는다. 이 미심쩍은 증발에 대해서도 곧 잊게될 것이다. 침침하게 가라앉고만 영양가없는 고백과 혐오마저도. 나는 무엇도 아니게 된 나를 피로에 놓아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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