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어두울 때라야만 그 드넓은 공간감이 온 세포 끝에 닿는다. 깊은 우물같은 방 안에서, 가을 초입에는 아직 발열할 때도 아닌 파이프 속을 오가는 물 소리를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때로는 이 어둠의 까닭모를 폭력성에 탄식하면서도, 내가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시 이불을 뒤집어 쓰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관념만큼이나 늘 체력도 종잇장처럼 얄팍해져 너덜너덜했다. 너덜한 이불을 붙들고 까무룩 잠이 들면 벌건 상처 위에도 딱지가 앉고, 화난 듯 부은 데도 가라앉곤 했다. 베개에 스미는 머릿내가 약손처럼 머릴 쓰다듬었다. 더는 디딜 틈이 없는 침대머리며 발 뻗는 데의 빼곡한 공간감은 그제야 익숙한 질서가 된다.
어떻게 일주일이 갔는지도 모를 날들 새로 눈을 굼벅일 때마다 붉은 고름줄들이 널뛰듯 또아리를 틀었다. 인류의 진화론적 조상과 같은 자세로 꾸역꾸역 글자들을 토해내고, 다시 허겁지겁 집어삼키고 했다. 정말 쓰고 싶은 글자들은 끄적여지다 만 채로 목구멍과 블로그와 현실 어딘가의 틈새에 잠시 끼었다가 모래알같은 바이트들로 스르르 흩어져내리곤 했다. 핏기어린 눈곱이 낀 고양이와의 인사와, 불행의 계산가능성과,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음에도 처음 발 딛었던 자리를 계속 돌아보게 되는 지난한 근성과, 완벽한 남자의 헌책방으로 가는 티켓에 대한 이야기들도 쓸려 나갔다. 대개의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쓸려나간 이야기들은 우물에 있다. 그것들은 습한 벽들 사이에 이끼처럼 끼어 우물 안에서만 맴을 돈다. 단 맛이 좋아 사카린 포대를 우물에 쏟아 부었다던 아이가 등장하는 개발독재기의 농담을 떠올린다. 어쩌면 그 아이가 그 달콤하고도 흉폭한 발암물질을 우물에 들이부은 때부터 이야기들은 말살되거나, 혹은 독한 내성을 품고 우물 안에서의 삶을 이어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부터 이야기라는 족속들은 죄다 내면의 이미지를 들여다보거나 그 안의 눅눅한 감정들을 긁어모아 내놓는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말이다. 그것들만이 달콤할 것으로 믿었고, 미각의 지평은 언제고 음습했다. 저칼로리 올리고당이 등장한 지금에도 여전히 이야기들은 우물을 고향으로 삼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물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리고 싶다. 말라붙은 이야기들에 물을 주고 싶다. 소독냄새 나는 이야기들을 소금을 묻혀 박박 씻어 단단하게 주물러내고 싶다. 나누지 않는 달콤함은 칼로리덩이들일뿐이다. 우리의 혀가 동이를 타고 오를 때를 상상한다. 낭창낭창한 붉은 혀끝이 세계의 공기에 가 닿을 때, 당신과 미각을 나눌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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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삭제헉 삭제한 흔적이 저렇게 남는다는 것인가.
답글삭제왔다 간다.
말라붙은 이야기에 물을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한
스테이지 3이 화요일이다.
그래서 오늘 도서관에 앉은 나는 약간 불안하고 많이 산만한 상태.
씨 유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