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1월 12, 2009

죽은 새, 스물넷.

가물은 날들이 이어진다. 등이 나간 스탠드 모가지에 젖은 수건을 걸어두는 일은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 떠날 생각을 하니 더욱 더 빌어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깊어지고, 또 떠날 생각에 살았던 곳곳마다 허물을 벗듯 기이한 모습을 내보인다. 걸음걸음이 한없이 정겨웠다가도, 또 뜬금없이 괴상한 공간으로 일그러지기도 하는 것이다. 

오늘은 죽은 새를 보았다. 14동 건물 뒷편, 인문대에서 낙성대 쪽으로 빠지는 삼거리에 닿기 위해서는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그 길목 한복판에 가슴이 열려 붉게 파헤쳐진 비둘기가 잔뜩 얼어 바닥에 붙어 있었다. 온기를 잃은 때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선명하고 탱탱한 내장들은 냉동창고나 다름없는 바깥 온도를 알려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운데를 피해 돌아갔을까, 하고 생각하며 낯선 헛구역질을 참는다. 까닭모를 죽음을 마주하는 방식은 늘상 그러했던가. 얼마나 많은 까닭모를 죽음들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죽음들을 외면했을까. 누군가는 이 가여운 생물의 사체를 거두어야 했을 것이다. 글쎄, 말이다. 

꼽아보기도 객쩍은 새 숫자, 스물넷을 왜인지 모르게 그 새를 떠올리며 차갑게 바싹 마른 공기와 함께 호흡했다. 이제는 새로이 올 시간들에 대해, 새롭게 엮어갈 관계들에 대해 어떤 날선 자신감이랄지 기대감같은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애꿎은 입술을 꾹꾹 깨물어 가며 되새긴 지금의 내 윤리일지도 모른다고, 그것이 어떤 에세이스트나 칼럼니스트들이 새로이 우리에게 고함치는 조금 덜 가지고 조금 더 가난해도 괜찮다는 자기긍정, 혹은 자기기만을 거스르는 일일지라도, 그 또한 어찌하겠냐고. 꿈들이 가난히 사멸해가는 시대에 뜨뜻미지근한 꿈 몇 푼 쯤 노잣돈삼아 반지하건 옥탑방이건 못 살 곳도, 못 할 일도 없다고, 단지 뜻밖의 행운이나 예상치못한 불운에도 의연하진 못해도 조금은 무덤덤해지자, 무덤덤해지자. 그것이 죽음에 대한 외면이라 비난받건, 죽어가는 연애세포의 징후이건, 간혹 머릿속을 징처럼 울리는 불안들과 내가 마주하는 방식은 이렇다.  

내가 무덤덤한 사람이 되는 댓가로 치른 삯은, 그 삯을 나중에야 알게 된다는 시간의 지연일테다. 실은 궁금할 것도 없다. 내장까지 깨끗이 비워냄으로써 사체가 그제야 식재료가 되듯, 스물셋이 묵은 때처럼 밀려나가고 남은 자리에 새 스물넷이 돋기 위해 비울 것들만이 잔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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