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3월 01, 2009

날카로운, 졸업.

날이 선한 과도의 한 끝이 살갗을 명중하듯 파고들었다. 살갗도 나도 잠시 얼이 빠졌다가, 금세 울컥울컥 차고 올라오는 선홍색 액체에 정신이 든다. 피는 쉬이 멎지 않는다. 사과의 피묻지 않은 자리를 골라 칼집을 낸 뒤 베어 문다. 남의 살을 취하는 데 적당한 값을 치러야 한다면, 밴드 하나로 족하면 좋겠다는 이 욕심. 좁은 밴드가 빼곡히 검붉게 물들고, 과일의 심지가 공기를 그득 머금은 색으로 변할 때까지 그대로 있는다. 밤새 더듬었던 어떤 몽상의 조각들이 울컥울컥 눈멍울을 두드리는 것만 같다.

나는 참을 수 없이 뒤가 마려웠고, 수치스러운 줄을 모른 채 문을 걸어 잠글 수도 없는 자리에서마저 볼 일을 보고만 싶었던 게다. 셀 수 없는 생략과 소실을 지나면 부적절한 입맞춤만이 남는다. 나풀나풀, 그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완강히 떼어내고픈 것만도 아니었다. 나의 볼 일은 결국 입맞춤이었던 겐가, 하고 무거운 눈꺼풀을 떼어내면 어제의 몸살과 급체가 채 가시지 않은 보잘 것 없는 내가 있지 않던가. 고작 한 모금에 털어넣을 가루약과 활명수면 되었을 것을, 미련스레 종일을 앓으며 깨달은 수치스런 욕망은 어느새 고개를 접고 현실의 미지근한 욕망만이 식은 채 남아 있다. 좁은 기숙사 방에서건, 원하는 대로 쓸고 닦아 꾸며 둔 내 공간에서건 시시껍절한 아픔과 외로움 마다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하고 쓸쓸한, 과도에 베인 마냥 쌉쌀한 감각을 울컥울컥 맛볼 수밖에 없다는 것. 누군가의 살갗과 보살핌을 파먹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이어야 한단 말인가. 

다만, 기대보다 몇 배는 더 수선스럽고 또 당황했던 졸업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감상에 겨운 줄을 뻔히 알았던 졸업사가 자꾸만 이를 채운 보철들 사이로 흘러내려 얼마나 우스웠고, 붙들고 무슨 이야기를 나눌 새도 없이 만나고 헤어진 이들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으며, 정작 기억들이 시퍼렇게 서린 자리들에는 걸음도 하지 못한 채 고작 몇 개월 전 공사가 완공된 낯설고 말끔한 공간에서만 머무는 것이 얼마나 객쩍었는지. 그럼에도 선선히 페어웰을 발음해준 이들에게 나는 얼마나 동지, 혹은 사랑이라는 수줍은 고백을 건네고 싶었던지 말이다. 기억하는 것에 대해 화해로울 수 없다면, 우리가 오기롭게 화해를 시도해야 하는 것은 다시금 그 기억들이 응고되지 않은 채 맞물린, 끈적이고 뒤틀어진 이 현재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점성진 진흙이 가득 묻은 손을 당신들에게 건넨다.

댓글 1개:

  1. "(...) "예전의 관점"에 기반을 둔 직선적인 진보는 가능하지 않으며 자신의 정체성이나 자아에 대한 발전적인 개념도 가능하지 않다. 가능한 것은 현재로 한 걸음 다가서기 위해 필연적으로 과거를 재평가하고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제한된 시선"의 끊임없는 팽창뿐이다. (...)" (Mohanty, 2004: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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