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사랑할 수 있을는지를 모를 날들이 밥풀처럼 묻었다가 떼어내 진다. 정말 배가 고프면 흉흉한 몰골의 뺨에 붙은 밥알까지 떼어 먹을 수 있는 걸까. 귀찮아서 끼니를 거른 적이야 셀 수도 없지만, 배를 곯아 절망한 적은 없다. 불안은 대개 이미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왔다. 하잘 것 없는 통장의 잔고며, 냉장고의 계란이며, 휴대전화의 수신함을 메운 바잇, 바잇, 바이트들. 바닥나는 것이 두려워 더 채워넣지 않으면 안 될, 밑 나간 쌀독같은 이 강박의 물신들은 언제고 완고했다.
사랑할 것이 도무지 없어질 때에 타인의 열정을 볼모삼게 된다. 마치 느슨히 뒤로 묶은 긴 머리의 편안한 곡선처럼, 나에게 없었고 앞으로도 영영 없을 그 어떤 것들에 나는 손쉽게 마음을 내어 놓을 준비를 한다. 부재의 자리들은 아크로바틱과 신디사이저로, 버라이어티와 우스꽝스런 자막들로 채워졌다. 무대에서 소녀들의 환호성을 한 몸에 받으며 정렬된 동작을 취하는 저 매끈한 몸뚱아리들이며, 흐르는 땀들은 마치 열정이라는 기표의 순수한 원형처럼 빛난다. 무엇보다도 더 밝게 빛나지만, 또한 곧 명멸해갈 그런. 허나 내가 취한 열정의 형식은 끝도 없이 어슴푸레하며, 발화인지 침잠인지 소멸인지조차 판단할 수 없을 그런 것은 아닌가. 열정에도 위계가 있을 줄을 틀림없이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열정과 밥벌이와 지식생산과 지식소비가 그렇게 아크로바틱하게 구분되는 것일 수 있던가. 답없는 질문을 무대의 소년들에게 던지는 꼴이 우스워 제풀에 웃는다.
웃으며 익숙한 길을 오랜만에 걸었다. 말하지도 웃지도 않고 걷는 것은 부당하며 또 해롭다. 걸음걸음마다 부서지고 무너져 나가는 것은 얼마나 파괴적인 일인가 말이다. 헤어진 오랜 옛 기억이 때로 살갗을 파고들듯, 어떤 사회적 사건의 결과 또한 잊을 만하면 돌아와 바짓자락을 적시게 마련인 줄을 그 때에는 몰랐던가. 아니, 결과는 언제나 과정의 연속이며 그 다음 것의 지연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기억하자. 선택으로부터 이어질 페이지들을 상상치 않았을 리야 없다. 허나 장마가 올 것을 알았다고 해서 옷이 젖지 않는 것이 아닌 것처럼, 결국 감기는 감기다. 감기에는 물음표가 없다. 그 익숙한 길에서 재채기를 할 것만 같았다. 백 번은 걸었을, 그러나 가히 다시 밟고 싶지는 않았던 길이다.
그래서, 다시 사랑 어쩌고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비틀거리는 버스를 타고 꼭 실수로 한 정거장 일찍 내려 걸어야 하는 그런 마음으로, 허탈하고 피로한 이야기. 나는 숭고한 무엇도 사랑할 무엇도 그것들에 관한 이야기도 믿지 않는 재미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울음을 글썽이거나 털썩 주저앉을 베짱도 배우지 못한 까닭에, 그저 모래같은 아침 시리얼을 입안에 부스럭대듯, 포스트 어쩌고 하는 글들을 꾸역꾸역 씹어 삼키기로 한다. 이제는 잔고가 없다. 몇 없는 동전들도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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