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9월 20, 2009
수요일, 9월 09, 2009
The un/true blood, the un/true nation.
The un/true blood, the un/true nation
민족주의에 대한 리딩을 정돈하고 있을 주말 무렵, 자주 가는 온라인 공간들을 가득 메운 논란이 하나 있었다. 굳이 ‘사건'을 정리하자면, 한 남성 아이돌 그룹의 재미교포 3세 출신 멤버가 데뷔 전 미국의 소셜네트워킹사이트인 Myspace에 ’한국‘과 ’한국인‘을 비하하는 글을 여러 차례 올렸고(올린 글이 남아 있었고), 그 사실이 최근 ’발각‘되어 온라인 공간에서 문제가 된 것이다(동아일보, 2009년 9월 5일). 해당 아이돌 그룹 및 팬덤에 애정과 비판적 고민을 담아 글을 썼던 경험이 있는 사람으로써, 나는 주말을 지나며 쏟아진 300여 개의 관련 기사와 눈덩이처럼 커져가는 온라인 공간(포털, 블로그 등)의 익명의 ’비난들‘과 팬덤의 자기규율을 보며 고민했으며, '나'를 머리 싸매게 하는 그 고민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페미니스트들은 극히 개인적이라고 여겨지는 것들, 이를테면 문화적 향유와 취향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구성되며 정치적 효과를 갖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왔다. ’한국(인) 비하‘ 논란을 두고 바로 그 개인적인 취향, 즉 이미지와 재현 및 그 생산과 소비를 둘러싼 애정과 혐오를 관통하는 민족주의 정치학이 내게 중요하게 다가왔음을 알았다.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모욕감을 느끼고 해당 스타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의 강렬한 증오와 분노는 대체 어디로부터 오며, 무엇을 향한 것일까? 그리고, 그들을 보며 ’한국(인)‘을 ’비하‘했다고 하는 ’재미교포 출신‘의 해당 스타의 치기어린 과거 행적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저러한 ’한국사회‘의 반응에 지끈거리는 ’나‘의 분노는 또 대체 무엇인가?
'Korea(n)' revisited
한국사회에서 ‘한국인’이라는 국적(nationality)의 문제는 늘 당연한 것(taken-for-grantedness)으로 잠재해 있다가 그것을 위반하는 순간에만 수면 위로 부상한다. 이 사건에서, 온라인 공간의 무수한 ID들은 “한국인인 나도 욕하지 않는” ‘한국’을 ‘모욕’한 아이돌 스타를 비난하며, 스스로를 ‘한국인’으로 (재)발견한다. ‘한국’을 ‘모욕’한 이를 단죄하기 위해 동원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재)발견이, 이처럼 ‘한국(인)’이라는 경계의 위반자를 강렬히 증오하고 타자화하는 방식으로 가능해진다는 점은 역설적이다. 화내고 분노하지 않는 모든 이들은 이제 ‘한국(인)’이라는 경계의 위반자가 된다. 위협받는 ‘한국’을 강력히 옹호하고 지키는 것이 바로 ‘한국인’의 정체성으로 (재)구성되는 순간이다. 이 때의 ‘자랑스러운’ ‘한국’은 언뜻 제국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역설은, ‘한국’이라는 기표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방식으로부터 온다. 과연 ‘모욕’되었다고 이야기되는 그 ‘한국’은 대체 누구에게,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당시 ‘비하’된 ‘한국’이 기실 10대 후반의 한 소년을 둘러싸고 있던 작은 세계였음을 읽어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때의 ‘한국’을 무조건적으로 사회역사적 실체로서의 ‘대한민국’으로 등치시킨다. 맥락상 누군가가 처한 특정한 ‘상황’에 대한 묘사가, ‘한국’이라는 실체로 오인(mis/interpretation)된다. 왜 당시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게 되었는지의 맥락은 더 이상 중요치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왜 ‘한국’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되지 않는다. 다시 이 ‘한국’은 ‘나’와 직접적인 연결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그 스타가 불평을 토로한 특정한 맥락으로서의 ‘한국’이라는 기표는 어느새 무수한 익명의 ‘나’(들)과 ‘한국’이라는 사회역사적 실체의 연결고리 속에 놓인다. ‘나’를 지키는 것이 생존본능처럼 당연하듯, 모욕당한 ‘한국’을 지키는 일 역시 너무도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I'll be back (to the U.S.)”: Entertainer? Migrant Worker?
“돈을 벌어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스타의 Myspace 소개글에 대해, “외국인 노동자, 양키 고홈”이라는 온라인 공간의 지배적 대응은, 이렇게 나-한국을 연결한 무수한 사람들이 분노하는 보다 직접적인 맥락을 잘 보여준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엔터테이너인 스타의 처지가 ‘외국인 노동자’로 번역되는 상황에서, ‘내국인’과 ‘외국인’의 분할선이 만들어진다. 이 때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에서 번 돈을 미국으로 빼돌리는”, 즉 ‘국부’를 유출하는 외부인으로 의미화된다. 여기에, 엔터테이너로서 아이돌 스타가 엔터테인먼트 산업 체계 내 구체적으로 ‘돈을 버는’ 행위자로 이해됨으로써, 이들이 주는 즐거움에 가정된 순수성으로 인한 배신감이 더해진다. 물론 이 때 한국에서 ‘3세계’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권 및 인권 착취의 역사는 ‘국부’ 유출에 대한 분노 앞에서 탈각되거나 희화화된다.
하지만, 정말 그가 ‘외국인 노동자’라면, 열악한 인권 상황의 한국에서 “한국인이 싫다(I hate Koreans)”라는 말이 더 사실감있게 다가오지 않는가? 또한 그러한 외침은 열악한 노동상황에 대한 고발이거나 호소로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지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엔터테인먼트 산업 체계의 ‘노동자’이며, 싫어도 싫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맥락에 놓여 있다. 그가 한국보다 ‘선진국’인 미국 출신이라는 점 역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가로막는다. 이러한 논리의 저변에 흐르는, 한국보다 열악한 경제상황의 ‘3세계’ 출신만이 ‘한국’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토로해도 괜찮다는 인식은 ‘한국’에 대한 발화 자체가 매우 위계화된 국가관계 하에서 가늠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가 ‘외국인 노동자’가 될 수 없는 까닭이 하나 더 있다면, 그가 ‘미국인’이라는 국적(nationality)과 무관하게 한국사회에서 인종적으로 온전히 ‘외국인’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몸은 한국인인데, 생각은 미국인”이라는 대중적 표현이 보여주는 것은, 재미교포라는 그의 출신배경이 한국사회에서 갖는 ‘어떤’ 종류의 타자성이다. (물론, 이 타자성에는 일정한 ‘특권’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섞인 것일 수도 있다.) ‘한국인’이 ‘한국’에 대해 탄식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허용가능한 일이지만, (한국에서 돈을 버는) ‘한국인’이 아닌 사람이 개인적 경험을 ‘한국’에 투사해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응징’되어 마땅한 일이 된다. 그러나, 그가 만일 온전한 ‘미국인’이었다면 지금처럼 온라인 공간이 들끓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예 ‘외부인’이라면 ‘한국’이 (혹은 ‘한국’으로서) 개입할 지점도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몸은 한국인인데, 생각은 미국인”인 사람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절대로 ‘순수한 피(true blood)’가 될 수 없지만, ‘한국인’만큼 ‘한국(인)’에 대해 잘 알고 존중할 것을 요청받는다.
"Korea is gay": Gender/Sexuality politics at the post/colonial system (of pop culture) in Korea
온라인 공간의 분노가 ‘모욕’의 출처로 지목하는 “한국이 싫다(Korea is gay)”는 표현과, 여기에서 'gay'라는 표현을 둘러싼 해석과 논쟁은, 앞서 ‘나’를 ‘한국’과 동일시한 사람들이 느꼈을 ‘모욕’의 핵심을 보여준다. ‘싫다’라는 관용적 해석을 넘어 ‘문자 그대로(literally)’ 호모섹슈얼화(homosexualized)되고 여성화(feminized)된 방식으로 ‘모욕당한’ 것으로 이해되는 ‘한국’은, 한국과 미국이 역사적으로 맺어 온 위계적인 국가 간 권력관계가 투사되는 기표이자 공간이 된다.
저 발화의 주체가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은 이 권력관계를 보다 명확히 드러낸다. 남성화된 미국과 여성화된 한국의 관계를 상기시기는 ‘gay'라는 표현에 대한 분노는, 해방 이후 한국에 정치적, 문화적 준거로 작동해 오며 국가로서 ’한국‘의 남성성을 거세해 온 미국의 존재에 대한 후기 식민사회 식민지인(남성)의 불안의 징후이다. “내가 랩을 못 하는데 잘 하는 줄 안다(eveyone thinks i'm like illest rapper wen i suck nuts at rappin)”는 말은, 해방 이후 미8군기지를 경유해 태동한 락와 팝에서부터, 이태원을 중심으로 성장한 테크노와 힙합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문화(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온 미국 대중문화와 한국 대중문화가 갖고 있는 원본성(authenticity)의 문제와 식민적 구조를 건드리고 있기에 더욱 더 비난받고 있는 것이다.
그 스타가 ‘한국인’ 혹은 ‘미국인’ 혹은 ‘한국계 미국인’이어서 팬이 된 적은 없었던, 그러나 어느 순간 ‘양키’가 된 스타의 (여성화된) 팬덤은 스타를 ‘옹호’함으로써 ‘정신나간 빠순이’가 될 것인지, 스타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고 그를 ‘비판/비난’함으로써 ‘한국인’이 될지 사이에서의 선택을 요구받는다. 어느 순간 바뀌어 있는 스타의 사회적 국적으로 인해 팬덤의 애정은 심문에 놓인다. 온라인 공간에서 이 심문을 주도하는 이들은, ‘한국’에 ‘양키’ 혹은 ‘외국인 노동자’로 표상되는 ‘외부’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비윤리적 존재들이거나, 존재한다고 해도 ‘한국(인)’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거나 ‘한국(인)’을 존경하는 ― 발화하지 않는(unspeakable) 존재여야 한다는 규범을 실천한다.
Questioning nation, nationality, nationalism
민족주의를 “현실에 대한 사유와 실천을 구성하고 생산하는 현실 규정력을 지닌 담론”(임지현, 2002: 183)이자 역사적 운동으로 이해한다면, 최근 한 아이돌 스타의 ‘한국’ ‘모욕’ 사건은 민족주의가 한국사회에서 작동하는 방식과 그 효과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법적 기준에서 범죄보다 더 큰 범죄로 사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나-한국을 동일시하는 수많은 이들은, 결코 이 사건을 관류하는 민족주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대응이 결코 민족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당연한 것(taken-for-grantedness)'이라는 강변이야말로 민족주의의 작용방식을 드러낸다.
이러한 대중적 반응은 ‘민족’을 언급하지 않으면 민족주의가 아니라는 인식론적 태도를 보이는, 그렇기에 민족주의에서의 ‘민족’이 ‘한국’으로 전이된 상황을 간과하는 이영훈(2004)의 (뉴라이트적) 입장에 가깝다. 자신들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모습에서는 긍정적이고 ‘저항적’ 민족주의와 부정적인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를 구분하며 전자를 정당화하는 신용하(2006)의 입장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을 ‘모욕’하는 글이 쓰여진 과거를 용서하자는 데 대해 “그럼 일제 식민지도 그냥 과거냐”고 공격적으로 되묻는 이들에게, ‘역사’가 갖는 일그러진 시간성은 단지 (신)보수주의로 이해하기에는 기묘하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제안되는 성찰들에서 보여지는 “(이런 상황을 보니) 한국이 진짜 싫어진다”는 말에서의 ‘한국’은 앞서 ‘모욕’된 ‘한국’과 얼마나 같으며 또 다른가? 여전히 ‘한국’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중요하다.
신진욱(2009년 8월 27일)의 지적이 의미있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서다. 87년 이후 형성된 ‘민주공화국 시민 정체성’은 애국주의(민족주의)와 국면적으로 결합한다는 그의 주장은, 민족주의 내부의 서로 다른 결들이 어떻게 헤어지고 결합하는지를 사고하게 한다. 그는 본질적인 ‘민족’ 개념이 아니라, 정치공동체이자 현재의 (잠정적) 삶의 무대로서 ‘대한민국’을 ‘집(home)'으로 맥락화하고 개념화했다는 점에서 ’한국‘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또한 현재를 고려하며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인식론적 전환을 제공한다. 이는 (탈식민) 페미니스트들인 Butler(1990)가 제안한 “연합의 정치학”(111), Mohanty(2003/2005)가 제시한 “함께 일하고 함께 투쟁하기를 선택한 사람들 간의 공동체”(22)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을 끊임없이 (재)구성해 나가야 할 정치적 공동체이자 삶의 무대로 이해하는 것은, 이 사건을 둘러싼 민족주의적 대응에 대한 ’나‘의 분노를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삶의 무대로서의 ’한국‘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으로 전화할 수 있게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사건이 한 ‘한국계 미국인’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방향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집단적인 ‘한국(인)’ 정체성 만들기와 민족주의, ‘진정한 국가(true nation)'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늘어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나, 제국과 식민지, 진보와 보수가 맺고있는 인식론적인 “적대적 공범관계”(임지현, 2004: 26)로서 민족주의를 심문하는 임지현의 비판은 여전히 의미있음에도, 그것이 누구에게 왜 어떻게 문제인지, 즉 어떤 권력이 무엇에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효과를 발휘하는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고 할 때, 신진욱(2009년 8월 27일) 역시도 간과하고 있는 87년 이후 새롭게 형성된 시민 정체성이 여전히 특정한 국면에서 왜 민족주의와 강력하게 결탁하며, 또한 그것이 발휘하는 효과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앞으로 국가(nation), 국적(nationality), 민족주의(nationalism)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지점이다. 이는 민족주의는 어떻게 젠더화, 섹슈얼화, 인종화된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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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어제 썼다. 하루가 지났고, 상황은 '많이' 변했으며, 지적하고자 한 상황은 더 극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아프지만, 달아날 곳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