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사온 겨울에는, 책장도 침대도 없이 바닥에 덩그마니 쌓인 책들과 함께 몸을 누이고서도 추운 줄을 몰랐다. 그 때 내가 무얼 하고 있었으며, 주로 누구와 말을 섞었던가 하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날씨처럼 당연한 일이련다. 꿈을 꾸지 않는다. 세심히 공들인 가내 풍경이 가득한 갤러리에 더는 걸음하지 않는다. 합성 수세미에 푸릇한 싹이 올라도 아직은 사용할 수저가 남았으므로 그것들은 다문 며칠간의 생을 더 얻는다. 이런 글을 차마 갈음하지 않는다. 생각이 꾸물꾸물 차오를 기회조차 주지 않으려는 양, 버스에 오르면 눈꺼풀을 앙다문다. 신문을 읽지 않는다. 밑줄을 긋지 않아도 되는 무엇도 읽지 않는다. 냉장고에는 신 김치가 든 반찬통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는지도 몰랐다. 그것들이 펑, 하고 터지는 상상 따위도 차마 하지 않는다. 별안간 두려워 혹여 며칠 연락이 안 되거든 이 곳을 찾아보아 달라고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을 따름이다.
문제는 기억이다. 퍽 아끼곤 했던 표현들이 총총거리며 기억의 저장고에서 달음질쳐간 자리에는, 까끌까끌한 손말만 남아 각을 잡고 서 있다. 망각을 식민화의 징후라고 한다면, 나를 식민화하는 힘이 대체 무엇인지를 나는 차마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해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마른 목이 축여지고 나서야 냉장고에 든 마실 것들이 떠오른다, 길을 꺾자 스치기만 하는 기구한 인연처럼. 나는 그 얼굴들을 마주할 기력이 없다고 조용히 뇌까릴뿐이다. 그 때, 키득거리는 작은 소동들이 모기처럼 날아오른다. 나는 그것을 손바닥에 움켜 쥔다. 시간은 졸지에 슈레딩거의 고양이가 된 모기의 숨에서 멎는다. 나는 차마 손을 펼치지 못한 채 우물쭈물이다. 변경 너머에는, 자명한 무엇을 요구하는 또다른 관성의 세계가 놓여 있었음을 경계를 넘기 전에는 알 수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손바닥을 펼치면, 모기 혹은 모기였던 것은 시무루루룩, 하고 어디론가 흘러내리고 없다. 나는 잠시 게워낸 관성을 다시금 위장 끝까지 밀어넣는다. 속이 편치 않은 것은 은밀히 싹이 트고 자라나는 증오와 무기력, 자유주의가 가장 혐오하는 동시에 강렬히 필요로 하는 그것들의 독함 때문일게다.